사순절에 8복에 대한 생각을 담아본다
밴쿠버의 목요일 아침, 팔복의 네 번째 복이 마음에 머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나는 의를 이렇게 정의해 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는 사람.”
문제는, ‘바르게 선다’는 말을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늘 애매했다는 점입니다.
어릴 때 나는 제도와 획일을 참 싫어하는 아이였습니다.
교복이 답답해서 학교를 빠져나오고 싶었고,
학생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문화에는 강한 저항감을 느꼈습니다.
그런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제도와 전통”을 누구보다 중시하는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유교적 기독교, 기복적기독교,
해방신학과 사회 정의에 대한 고민을 곁눈질해 보았지만,
정작 캐나다라는, 제도와 시스템이 이미 잘 갖춰진 곳에서
그 혜택을 누리며 목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질문이 올라옵니다.
“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인가,
아니면 사회적 의를 말하는 것으로 내 갈증을 ‘포장’하고 있는 것일까?”
의가 개인의 경건이냐, 사회 정의냐 하는 논쟁에 갇힌 채
정작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주리고 목마르다”는 표현은
그냥 출출한 상태, 목 좀 축이고 싶은 상태가 아니라고 합니다.
헬라어 원어는, 아사 직전의 극심한 굶주림,
사막에서 죽기 직전에 물을 찾는 갈증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에 대한 갈망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정도의 관심이 아니라,
“이게 없으면 나는 살아갈 수 없다”는 절박함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 기준으로 나를 붙들어 보면
좀 난감해집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숨이 막혀 오는 사람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안정된 선진국에서
불평할 여유가 있는 만큼만 ‘의’를 말하는 사람인가?
내 안의 갈증이 얼마나 깊은지,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부터가 쉽지 않습니다.
캐나다와 한국, 두 나라를 오가며 살다 보니
나는 분명히 세계 상위 몇 퍼센트 안에 드는 안전망 속에 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작동하고,
세금이 그나마 공정하게 쓰이고,
기본 의료와 교육이 보장되는 나라.
그 시스템 속에서 보호를 받으면서도
교회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필요한 비판도 있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구조의 혜택은 충분히 누리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로
내 작은 불편함을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팔복의 “의”가 개인적인 경건과 사회적 정의를
둘 다 포괄하는 개념이라는 해석에 동의하면서도
정작 그 의를 향한 나의 갈망이
얼마나 실제 삶의 선택으로 이어지는지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생각은 늘 앞서가 있는데,
생활은 자꾸 뒤에 남겨두고 오는 느낌.
그 간극이 요즘 들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아니야”라며
자책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질문을 조금 좁혀 보고 싶습니다.
“우파냐 좌파냐, 진보냐 보수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에게
의에 대한 갈증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지금 내가 느끼는 의에 대한 갈망은,
거대한 구호보다 훨씬 작은 자리에서 얼굴을 드러냅니다.
글에서,
제도와 전통보다 예수님의 좁은 길을 더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마음
시스템이 허락한 안락함 안에서도
부당한 것에 침묵하지 않으려는 작은 결심
내 불평보다, 오늘도 구조의 바깥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이들을
한 번 더 떠올리게 되는 양심의 찔림
이 모든 것이 아직 미완성이고,
종종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그 모순을 “이상하다”라고 느끼는 감각 자체가
내 안에 남아 있는 의에 대한 갈망의 흔적은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 해석을 들여다보다가
마음에 남은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미 의를 완전히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얻어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이 말이 내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눅눅한 자기의에 취한 상태가 아니라,
“나는 아직 멀었다”는 자각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더 알고 싶고, 더 바로 서고 싶고,
더 하나님 쪽으로 기울어진 선택을 하고 싶어지는 마음.
지금의 나는,
선진국의 시스템을 누리며 불평을 섞어 말하는
모순된 사람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순이 낯설게 느껴지는 한,
나는 여전히 의에 대한 갈증을 잃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팔복의 네 번째 복 앞에서
이렇게 조용히 고백해 보고 싶습니다.
“주님, 저는 아직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때로는 제도와 전통을 비판하면서도
그 안락함 속에 깊이 기대어 살아갑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의에 대한 갈증만은 잃지 않게 해 주세요.
사회의 의를 말할 때에도,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 자신의 자리를 먼저 보게 해 주세요.
생각에만 머무는 정의가 아니라,
일상에서 한 걸음이라도 좁은 길 쪽으로 옮겨 가는 용기를 주십시오.
배부르다고 착각하지 않고,
오늘도 당신의 의를 더 구하며 살아가는
‘갈증 있는 사람’으로 남게 해 주세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거창하게 일반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각자의 자리와 역사, 특권과 상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미 충분히 의롭다”는 만족 대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갈증을 품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팔복의 약속이 조금씩 우리에게도
현실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