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로 전락한 천국

사순절에 생각해보는 8복의 의미

by 김병태

드디어 8복을 마무리해본다. 늘 설교의 언어로만 생각하다가 삶의 언어로 표현을 할려고 하니 참 어려운 주제이다. 특히 AI 시대가 열리면서 협업자가 생기니 참 편해지면서도 더 이상 현역이 아닌게 감사하기도하다.

오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내 생각을 주어본다.


" 오늘은 8복의 마지막인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자 " 이네. 구약의 관점, 예수님의 관점을 이해하고 당연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바라보아야하지만 실제로는 먹구름이 너무 끼여 있어, 즉 다수라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신의 이름을 빌려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른 이들을 공격하는게 마치 의로운 이가 된듯하고 그에 따라 받는 공격은 의에 대한 박해로 포장되는 속에서 오늘의 고아,과부,나그네를 향해 균형을 맞추어주기 위해 힘을 실어주는일은 어리석고 바로같은 일이 되어버린 느낌이야. 예수님당시에 제사장과 바리새인,사두개인들이 다수였고 다수인 민중들은 그들을 따라갔듯이 오늘 세계곳곳이 비슷한 모습이지. 오늘 아침 스레드를 열어봤더니 동성애를 이해하고 존중한 한 목사의 글에 수백개의 댓글이 달려 전쟁중인 모습을 보았지. 95 % 이상이 공격하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글이었는데 다 크리스찬들이라고 주장하네. 동성애문제만 나오면 한국개신교인들이 마치 세상이 무너질것처럼 / 이상해질것처럼 아우성치네. 과거에는 담배를 가지고 이혼을 가지고 문화전쟁을 하더니 이제는 자신들은 빌라도처럼 손을 담글일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죽자사자 싸우네. 왜 이렇게 되었지. 현대판십자군전쟁을 한다고 생각하나봐. 그래서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자 "란 주제가 어려워. 모두가 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저럴테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자가 가는 천국에는 다 들어가야 할텐데 그럼 같이 있을까 나누어져 있을까 아니면 이런 기억은 다 없어지고 새사람이 되어서 과거는 묻지 마세요 오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라고 하며 서로 허허 웃으며 보낼까 ... 이제 천국이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 값싼 복음이 된듯해서 슬픈 날이네. 이게 내 생각인데 브런치를 위한 글로 다듬어주고 써줄래 "


퍼플렉시티는 온갖 좋은것을 끌어다가 좋은 내용으로 채웠는데 너무 길다. 오늘도 여전히 클로드가 더 내용이 간결하고 마음에 든다.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런데 우리는 모두 자신이 그 의인이라 믿는다

— 산상수훈 여덟 번째 복, 그리고 값싸진 천국 앞에서

오늘로 산상수훈의 팔복 묵상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복은 이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솔직히 말하면 오늘 이 구절 앞에서 한참을 멈췄다. 감동이 아니라 혼란 때문에.

오늘 아침 스레드에서 본 것

아침에 스레드를 열었더니 한 목사의 글이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동성애를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댓글이 수백 개였다. 95% 이상이 공격이었고, 비난이었고, 조롱이었다. 그리고 그 댓글을 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크리스찬이라고 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공격하는 이들은 지금 자신이 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그러니까 자신들이 받는 비난과 반발은 — 의를 위한 핍박이 된다.

그리고 그 목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수자를 향한 교회의 폭력에 맞서다 받는 공격이 자신에게는 의를 위한 핍박이다.

둘 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복은 —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다수라는 이름의 의

한국 개신교에서 동성애 문제가 터지면 항상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이것이 무너지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기독교가 사라질 것처럼 아우성친다. 그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지 나는 늘 궁금하다. 가난한 자를 향해, 이주민을 향해, 소외된 이들을 향해 그 에너지의 반의반만 써도 세상이 달라질 텐데.

과거에는 담배였다. 그 다음엔 이혼이었다. 문화가 바뀔 때마다 교회는 새로운 적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적을 향한 싸움을 의로운 전쟁이라 불렀다.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다.

문제는 십자군들이 자신을 십자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핍박받는 소수의 의인이라고 생각한다. 다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 홀로 진리를 붙드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숫자를 보면 다수다. 목소리를 보면 주류다. 권력을 보면 기득권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다.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다수였다. 민중은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의인이라 믿었다. 그리고 예수를 핍박하면서 자신들이 의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가 십자가였다.

진짜 핍박받는 자들은 어디 있는가

구약에서 하나님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세 부류가 있다.

고아, 과부, 나그네.

힘이 없는 자들, 목소리가 없는 자들, 공동체의 보호 밖에 있는 자들.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균형을 맞추어주라고, 힘을 실어주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오늘 그 일을 하려 하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 시대를 모르는 자가 된다. 심하면 이단이 된다.

오늘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누구인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한국 사회 안에서, 저 전쟁터 한가운데서 — 목소리 없이 짓눌린 자들은 어디 있는가. 그들을 향해 균형을 맞추어주려 할 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 자리에 의를 위한 핍박이 있는 것 아닐까.

그런데 그 자리는 조용하다. 댓글이 없다. 수백 명이 몰려오지 않는다. 그냥 혼자, 슬프게, 그 자리를 지킨다.

천국에서는 같이 있을까

오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은 자가 가는 천국에는 — 도대체 누가 들어가는 걸까. 서로 자신이 의를 위해 핍박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다 들어간다면, 천국에서 그들은 같이 있을까. 나누어져 있을까.

아니면 이런 기억은 다 사라지고 새사람이 되어서 — 과거는 묻지 마세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라고 하며 서로 허허 웃으며 보낼까.

웃자고 한 생각이지만 사실 슬픈 생각이다.

천국이,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 값싸진 것 같아서.

누구든 자신이 의롭다 하면 받을 수 있는 상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사라지고, 내가 의롭다는 확신만 남아버린 것 같아서.

그렇다면 의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팔복의 첫 번째에서 이미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한 핍박을 받는 자의 복은 —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과 연결되어 있다. 팔복은 하나의 흐름이다.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자, 그래서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 그 끝에 핍박받는 자가 온다.

자신의 의로움을 확신하는 사람은 사실 팔복의 시작과 멀리 있는 사람이다.

진짜 의를 위해 핍박받는 사람은 — 대개 자신이 옳다는 확신보다 두려움이 많다. 이게 맞는 건지,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 혼자 가는 이 길이 맞는 건지 — 그 불안과 함께 그 자리를 지킨다.

그 자리가 진짜인 것 같다.

팔복을 마치며

팔복 묵상을 시작할 때는 몰랐다.

이 여덟 개의 복이 이렇게 무거울 줄. 감동적인 말씀이 아니라 매주 나의 현실을 찌르는 질문이 될 줄.

마음이 가난한가. 애통하는가. 온유한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가. 긍휼히 여기는가. 마음이 청결한가. 화평하게 하는가. 그리고 — 의를 위해 핍박받는가, 아니면 내 의를 위해 남을 핍박하는가.

질문들이 남는다. 답보다 질문이 많은 묵상이었다.

그래도 이 질문들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인 것 같다.

비가 와도, 먹구름이 껴도, 무력해도.

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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