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웃은 누구인가 !
주일 저녁, 아내와 각자의 교회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다른 교회에 다니는 부부다. 같은 신앙을 가졌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주일을 보내고 돌아온다. 그 대화가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깊고, 때로는 불편하다.
그날 대화 중에 아내가 물었다.
왜 당신은 그걸 용납하느냐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내가 죄인이라고 주님 앞에 고백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삶을 정죄하냐고. 법률상 범죄이거나 다른 이의 삶에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라면 따질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런 차원이 아니지 않느냐고.
대화는 계속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한국 기독교의 많은 논쟁들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패턴이 보인다.
결론이 먼저 있다. 감정적 거부가 먼저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 구절이 동원된다.
이것은 신앙이 문화를 이끄는 게 아니라, 문화가 신앙을 포장하는 것이다.
수천 년 유교적 토대 위에 형성된 감수성 — 위계, 질서, 집단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 그 위에 기독교적 언어가 입혀진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선포된다.
담배가 그랬다. 이혼이 그랬다. 시대마다 교회는 새로운 문화 전쟁의 서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서사 안에서 누군가는 항상 정죄의 대상이 되었다.
이미 감정적으로 결론이 난 자리에서는 어떤 논리적 설득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는 그날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예수의 말씀과 삶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있다.
그는 당시 사회가 배제한 사람들과 함께 앉았다. 세리, 죄인, 창녀, 사마리아인. 종교적으로 깨끗하지 않은 자들, 민족적으로 다른 자들,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여겨지는 자들.
그리고 그를 가장 날카롭게 정죄한 사람들은 —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기억한다. 강도 맞은 자를 지나친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이었다. 멈춰 선 것은 당시 사회가 배제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예수는 그 이야기를 마치며 묻는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웃이 누구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는가의 문제다.
나는 거창한 신학적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
이길 수도 없고, 이길 필요도 없다. 문화적 감수성 위에 형성된 확신은 논리로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의 삶 속에서, 가족 중에서, 주변에서 직접 경험들이 쌓여가는 어느 날 — 사회의 주류 담론이 조용히 바뀌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교회가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대로 —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합당한 대접과 환대와 친절로 맞이하는 것.
강도 맞은 자 곁에 멈춰 서는 것.
누구든, 어디서 왔든, 어떤 삶을 살든 — 그 사람의 이웃이 되는 것.
그게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신앙의 전부인 것 같다.
한 주를 그렇게 시작한다.
일산에서, 월요일 아침.
누가복음 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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