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단함앞에서

의로운 사람을 찾습니다.

by 김병태


어제 저녁, 슈퍼에 가는 길에 삼겹살집 앞을 지나쳤다.

통유리 너머로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3명 테이블, 4명 테이블, 5명, 6명. 고기 굽는 연기 사이로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하루의 고단함을 털어내는 그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나도 그런 밤들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걸어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의 고단함은 삼겹살과 술로 풀 수 있다. 그런데 삶의 고단함은 어떻게 푸는가.

마태복음 첫 장에 등장하는 한 남자

집에 돌아와 마태복음을 펼쳤다.

첫 장에 요셉이 나온다. 예수의 아버지. 그런데 마태는 그를 소개하면서 단 한 줄을 쓴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왜 이 한 줄이 나오는가. 맥락이 있다.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다. 요셉은 그 사실을 알았다.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경험하는 것 — 그것은 삶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다. 분노해도 당연하고,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고발해도 당시 율법으로는 정당했다.

그런데 요셉은 다른 선택을 한다.

마리아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비밀리에 약혼을 깨려 한다. 자신의 상처보다 상대방의 안전을 먼저 생각한다. 분노 대신 보호를 선택한다. 상식 대신 친절을 선택한다.

마태는 바로 그 순간을 가리켜 말한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의로움은 종교적 형식이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의로움을 종교적 언어로 이해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 율법을 지키는 것.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것.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의로움은 삶의 태도다.

가장 상처받은 순간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어디에 쓰는가. 상식이 허락할 때도 친절을 선택할 수 있는가. 내 억울함보다 상대방의 생명을 먼저 볼 수 있는가.

그것이 의로움이다.

그리고 그 태도가 요셉을 예수의 아버지로 세운다. 거창한 영적 능력이 아니라, 가장 힘든 순간의 가장 조용한 선택이 그를 그 자리에 서게 만든다.

삶의 고단함 앞에서

다시 어제 저녁의 그 풍경으로 돌아간다.

삼겹살집의 젊은이들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그 고단함이 진짜라는 걸 안다. 하루를 버텨낸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삶의 선물이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한다.

하루의 고단함은 삼겹살과 술로 풀 수 있다. 그런데 삶의 고단함 — 배신당한 상처, 기대가 무너진 자리, 믿었던 것이 흔들릴 때의 그 허탈함 — 그것은 무엇으로 푸는가.

요셉은 그 답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고단함 한가운데서 다른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그를 살게 한다. 아니, 더 크게 살게 한다.

의로운 사람을 찾습니다

오늘 아침 기도하며 이런 마음이 생겼다.

종교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 삶이 고단한 가운데서도 친절을 선택하는 사람. 상처받은 자리에서도 상대방을 보호하려는 사람. 다수의 상식을 따르지 않고 조용히 다른 방향을 걷는 사람.

그런 의로운 사람들을 찾고 싶다.

그리고 그 의로움을 함께 나누고 격려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

요셉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그 자리에서, 그 순간에, 친절을 선택하는 사람이면 된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 삶의 고단함도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

금요일 아침, 일산에서.

마태복음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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