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고난주간 화요일아침에
고난주간이다.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과 날카롭게 논쟁하셨던 화요일 아침을 맞이한다. 십자가를 며칠 앞두고 성전에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과 맞서셨던 그날. 그 논쟁의 핵심은 결국 하나였다. 누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 질문이 오늘도 유효하다.
초대 기독교는 박해 속에서 태어났다.
로마 제국의 감시 아래, 지하 무덤 카타콤에서 예배드리며,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던 공동체. 그들은 예수의 정신을 가장 순수하게 살아냈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병든 자를 섬기고, 서로의 짐을 나누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선포한 순간부터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유해졌다. 권력을 가졌다. 그리고 서서히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박해받던 자들이 박해하는 자들이 되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는 이 패턴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지금 미국을 본다.
보수 기독교가 현 정부 권력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사람들이 권력의 언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동의 전쟁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이스라엘을 본다.
나치의 대학살을 경험한 민족이다. 그 고통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스스로 억압자가 되어가고 있다. 피해자의 서사를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
한국을 본다.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선 나라다. 가난과 고통의 기억이 신앙의 에너지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가 되어가는 지금, 그 가난했을 때의 서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잘 나갈 때를 관리하지 못하면 스스로 무너진다.
부유해질 때 낮아짐의 영성을 붙들지 못하면, 처음의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다.
나는 얼마 전 30년의 목회를 내려놓았다.
목회를 하는 동안 나도 이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더 큰 교회, 더 많은 성도, 더 나은 시설. 보이지 않는 비교의 어리석음 속에서 지쳐가는 시간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
더 이상 비교할 필요가 없다. 증명할 필요가 없다. 군림할 자리도 없다.
오히려 그 자리가 자유롭다.
그리고 그 자유로운 자리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제도의 무게를 내려놓고 예수의 영성으로 돌아가는 것.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다.
당시 사회가 배제한 자들, 종교가 정죄한 자들,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 여겨지는 자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것이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스캔들이었다.
환대와 친절. 낮아짐과 섬김. 권력이 아닌 사랑. 군림이 아닌 동행.
그것이 예수의 영성이다.
초대 교회가 박해 속에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 영성 때문이었다. 권력이 생겼을 때 그 영성을 잃어버린 것이 역사의 비극이었다.
고난주간 화요일 아침.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셨던 그날처럼, 오늘도 같은 질문이 남는다.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낮아지고 있는가, 높아지고 있는가. 섬기고 있는가, 군림하고 있는가. 환대하고 있는가, 배제하고 있는가.
잘 나갈 때가 가장 위험하다.
그러나 내려온 자리에서, 비교의 어리석음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다시 예수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것 — 그것이 오늘 나에게 주어진 도전이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던 예수님처럼.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환대와 친절을 먼저 내미는 것으로 이 화요일을 살아내보려 한다.
일산에서, 고난주간 화요일 아침.
마태복음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