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수요일 침묵의 날 아침에
고난주간 수요일이다.
예수님의 행적이 기록되지 않아 침묵의 날이라 불린다. 무엇을 하셨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십자가를 사흘 앞두고 조용히 그 날을 보내셨을 것이다.
오늘 나도 그 침묵 속에 앉아있다.
어제 뜻밖의 일이 있었다.
교보문고에 강연이 있었다. 30년 만에 옛 교회 친구가 AI에 관한 책을 출간해서 강연한다기에 찾아갔더니 또 다른 친구가 와 있었다. 30년 만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교회는 다니냐고.
친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교회는 안 다니지만 예수는 믿지.
60대 초반. 한때 함께 신앙의 시간을 보냈던 친구. 그에게 교회는 이제 돈을 밝히는 친교 공동체 정도로 남아있었다.
그 대답이 한참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70년대, 80년대 한국 교회는 달랐다. 가난했다. 그래서 순수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성장에 뛰어들던 그 시절, 서로를 붙들고 기도하던 공동체. 억압의 시대에 민중과 함께 울던 교회. 그 시절의 신앙에는 냄새가 있었다. 땀 냄새, 눈물 냄새.
그런데 한국이 부유해지면서 교회도 함께 부유해졌다. 더 큰 성전, 더 많은 프로그램, 더 화려한 예배. 성장이 곧 축복이라는 서사가 교회를 지배했다.
그 사이 무언가가 사라졌다.
지금 60대인 친구가 경험한 30년은 그 변화의 응축이다. 한국 사회의 압축 성장과 함께 교회도 압축 변질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교회는 안 다니지만 예수는 믿는 사람들.
요즘 이란의 소식이 들린다.
휴전이든 종전이든 전투가 끝이 나면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도시를 재건해야할텐데 , 그 재건을 위해 사람들이 힘을 합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물리적 건물보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도 그렇다.
이미 추락하기 시작한 이미지를 회복시키기 위해 여전히 애쓰는 공동체들이 있다. 그 노력이 가상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역부족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인가.
부유해진 교회는 지킬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킬 것이 많은 자는 내려오기 어렵다. 내려오지 않는 자는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화려한 재건의 구호로는 안 된다.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도 안 된다. 더 세련된 예배 형식으로도 안 된다.
결국 사람이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영적 지도자. 도덕적으로 투명한 지도자들과 평신도들.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도 예수의 길을 묵묵히 걷는 진짜 사람들.
거창한 회복 운동이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가난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 비교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고, 군림하지 않고 — 그냥 예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오늘 예수님은 침묵하셨다.
아무 기록도 없다. 아무 행적도 남기지 않으셨다. 십자가를 앞두고 그냥 조용히 그 날을 사셨다.
어쩌면 그 침묵이 가장 깊은 말씀인지도 모른다.
나도 오늘은 그 침묵 속에 앉아본다. 교회를 떠났지만 예수를 여전히 붙들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생각하며. 그리고 그런 이들이 혼자가 아님을 조용히 확인하며.
화려한 재건의 구호보다 정직한 회복의 한 걸음. 오늘 나부터 그 가난한 한 사람이 되기로 한다.
일산에서, 고난주간 수요일 아침.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Sonnet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