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목요일, 발을 씻기신 그 분을 생각하며
고난주간 목요일이다.
최후의 만찬이 열린 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날. 그리고 배신이 시작된 날.
만찬장을 상상해본다.
열두 명이 모여 앉았다. 저마다 다른 꿈을 품고. 누구는 혁명을 꿈꾸고, 누구는 권력의 자리를 꿈꾸고, 누구는 배신의 값을 계산하고, 누구는 그냥 두려웠다. 예수를 따르면서도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면서 누가 더 열성적인 혁명의 동지인가를 논하던 사람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는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다.
오늘도 그 만찬장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십자군의 전쟁을 노래하는 미국의 국방장관. 이에 맞서는 이란의 혁명수비대. 이 불의한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유럽. 보복을 다짐하는 미국의 엄포. 이 기회에 적을 제거하려는 이스라엘. 그 사이에 끼여 에너지난을 겪는 아시아의 민중들. 그리고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조용히 돈 벌 기회를 계산하는 투자자들.
누가 더 혁명의 대열에 앞장서는가. 누가 이 상황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는가. 누가 이 모든 것 사이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가.
최후의 만찬장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은 2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도도한 강물처럼 흐르는 이 어리석음을 내가 어찌하리요.
예전에는 이 풍경 앞에서 좌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 세상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절망. 거대한 강물 앞에 선 한 사람의 초라함.
그런데 지금은 다르게 바라본다.
그 거대한 강물을 내가 막을 수 없다. 혁명의 방향을 내가 바꿀 수 없다. 강대국들의 계산을 내가 뒤집을 수 없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십자군의 전쟁에 억지로 징집된 군인들의 두려움을 어루만지는 것.
혁명의 수단으로 전락한 민중의 아픔 곁에 앉는 것.
에너지 전쟁의 희생양이 된 이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
사람의 고통을 돈놀이의 수단으로 바라보는 이 어둠의 땅에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것.
예수가 그러셨다.
로마 제국을 뒤집지 않으셨다. 혁명의 깃발을 드시지 않으셨다. 대신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셨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두려운 자들 곁에 앉으셨다.
한국에 있다.
한국 교회가 시작한 거대한 문화전쟁의 흐름이 보인다. 그 전쟁은 집에서,교회들에서,광장에서 십자군의 전쟁으로 포장되어 혐오와 대립과 분열을 부추긴다. 거기에 참여하는 다수군중의 목소리가 크고 뜨겁다. 그 안에서 극소수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외롭다.
나는 그 극소수와 함께하기로 한다.
어리석은 혁명의 부품이 되지 않겠다. 십자군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 대신 오늘 최전선에서 가장 공격당하는 이들 곁에 서겠다. 두려움의 자리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 그들의 발을 씻기는 사람이 되겠다.
예수의 환대와 친절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던 그분의 이름으로.
그 자리에서 십자가를 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자리를 지키겠다.
요즘 벚꽃이 한창이다.
화려하다. 눈부시다.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런데 그 찬란함은 짧다. 며칠 피었다가 바람에 흩어진다. 화려했던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땅바닥을 보면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냥 거기 피어있다. 조용히, 오래, 자기 자리에서.
나는 그 작은 꽃이고 싶다.
혁명의 무대에서 빛나는 벚꽃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오래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 화려한 문화전쟁의 승자가 아니라. 가장 두려운 자리에서 가장 조용하게 발을 씻기는 사람.
그것이 오늘 최후의 만찬장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라 믿는다.
고난주간 목요일. 그 발을 씻기시던 손을 생각하며 오늘을 시작한다.
일산에서.
요한복음 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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