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캐머런, <아티스트 웨이>
창의성은 타고 나는 걸까 길러지는 걸까. 나도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제는 진부 하게마저 느껴지는 이 질문이 20년 전에는 꽤나 뜨거운 화두였다. 창의성을 강조하던 학교에 입학한 나는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자신을 한 마디로 표현해 보세요." "???" 세상에서 들은 가장 난처한 질문 중 하나였다.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나지 않고 지금도 답하기 어렵다.
같은 자리에서 면접을 본, 나보다 나이가 아홉 살은 더 많은 늦깎이 학생 오빠는 "와우(Wow)!"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세상에! 그 순발력과 자신감이란! 나는 그렇게 자신 있고 서슴없이 자신을 바로 표출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창의성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창의성은 과연 그런 것일까. 나를 과연 한 마디로 표현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 오빠도 자기를 한 마디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런 감탄사를 내뱉은 것일 게다.
나처럼 창의성에 관해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 책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목차라도 훑어볼 것이다. '아티스트 웨이(Artist Way)' 예술가의 길, 예술가의 방식이라니, 그럴듯하지 아니한가. 대체 예술가는 어떤 길을 가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책을 펼쳐 들었다. 이 책은 미국 출신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 영화평론가인 줄리아 캐머런이 창의성에 분투하는 동료 예술인의 회복과 재기를 돕기 위해 쓴 책이다. 개인사를 언급해서 죄송하지만, 캐머런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 소감에서 영광을 돌린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동료이자 전 부인이다.
이 책의 결론부터 말하면, 창의성은 어디서 쥐어 짜내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므로 자기 검열을 하지 말고 편안하게 풀어놓으면 된다. 거창한 소개에 비해 답이 너무 간단하다고 생각하거나 명확하게 알려줘서 고맙기는 한데 그걸 대체 어떻게 풀어내는지 궁금할 것이다.
아티스트 웨이의 핵심은 모닝 페이지(morning page)와 아티스트 데이트(artist date)이다. 모닝 페이지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생각나는 대로 가감 없이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오늘 날씨가 어떻다더라?', '어제 빨래를 안 돌렸네', '저녁에 뭘 먹지' 이렇게 화살처럼 쑥쑥 날아드는 생각부터 '부장님 진짜 어제 짜증 났다', '요즘 왜 이리 마음이 우울하지?',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데 월급은 제 때 나올까?' 이런 감정과 염려까지 무엇이든 가능하다. 모닝 페이지는 우리 내면의 창의성을 가로막는 검열관을 무장해제하는 연습에 가깝다.
아티스트 데이트는 매주 한 번 정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과 데이트 시간을 갖는 것이다. 산책이든 게임이든 무엇이든 내면의 욕구를 따라 어린아이처럼 노는 시간이다. 모닝 페이지로 비워낸 내면을 창의성으로 채워 넣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보면 모닝 페이지와 아티스트 데이트의 역할은 요즘 유행하는 명상과 비슷하다. 하지만 명상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반면, 아티스트 웨이는 실천을 필요로 하는 적극적인 활동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캐머런은 어떻게 이런 방식을 알아냈으며 효과를 어떻게 자신할까? 캐머론 자신이 알코올중독을 벗어난 작가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글을 쓰지 못했고 나중에는 거의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자신을 회복시킨 방법이 바로 모닝 페이지와 아티스트 데이트이다. 자신의 경험을 알리면서 워크숍을 열기 시작했고 입소문을 타고 전 세계에 퍼지면서 교안을 요청받아 집필한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은 12주에 걸쳐 창조성 회복에 관한 본문을 읽고 과제를 수행한다. 혼자서도 할 수 있고 모임을 만들어 함께 해볼 수도 있다. 단순히 독서용이 아니라 워크북에 가깝다. 몇 시간 내로 읽기보다 3개월에 걸쳐 매주 한 챕터만 읽으며 100여 일에 걸쳐 습관을 만들어 나갈 때 진짜 효과를 맛볼 수 있다. 경험해 본 결과, 모닝 페이지와 아티스트 데이트는 중독성이 있다. 한 번 맛보면 끊어질지언정 생각이 나고 마음 한편에 남는 그런 활동이다.
캐머런은 신이 이미 우리 내면에 창조성을 심어주었다고 말한다.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창조주(Creator)를 자주 언급하고 성경을 인용하기도 한다.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God을 '신'으로 번역했고, 캐머런 역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창조주를 '초월적인 존재' 혹은 '창조성' 그 자체로 대치해도 무방하다고 했다. 타 종교인이거나 무신론자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데, 내가 함께 책을 읽은 모임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번역본 특성상 원문을 100% 옮겼다고 볼 수는 없다. 몇 문장에 불과하지만 번역되지 않은 것도 있고 원문과는 다르게 번역된 것도 더러 발견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영어 원서 못지않은 훌륭한 번역서라고 생각한다. 모닝 페이지는 타이핑해도 되는지 아니면 손으로 필기를 하는 게 더 좋은지, 한글로 분량을 얼마나 작성해야하는지가 정말 궁금했다. 캐머런의 다른 책에서는 손이 적어 내려가는 동안 생각을 더 꺼낼 수 있게 필기를 하는 편이 더 좋다고 설명한다. 이 책을 실천한 다른 사람의 후기를 보면 영어와 달리 한글은 압축적이기 때문에 열서넛 줄짜리 듬성듬성한 노트 페이지 기준으로 세 장 정도 적으면 된다고 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인용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이다. 봉 감독은 대학 시절 어느 책에서 이 문구를 읽었다고 한다. 이 말을 마음에 담고 '자신이 곧 장르'가 된 봉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기립 박수갈채를 선사했다. 캐머런의 아티스트 웨이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가장 창의적인 것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라고. 내면의 창조성을 검열하지 말고 뛰놀게 내버려 두면 된다고. 그리고 그것은 모닝 페이지와 아티스트 데이트 같은 꾸준한 노력을 요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