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2023년 5월 중순부터 시작된 “토지” 읽기가 2024년 1월 2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끝났다. 최소 400쪽에서 평균 420쪽가량의 20권. 매주 1권씩 읽어도 20주, 5개월은 족히 걸리는 분량이다. 지인 방문이나 여행 등으로 손에서 놓은 6주 정도를 제외하면 6개월에 걸쳐 일주일마다, 때로는 걷잡을 수 없이 말려들어가 하루 만에 한 권을 읽었다. 후반부에는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때마다 읽고 식사가 끝난 후에도 놓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30분에서 1시간 정도를 더 읽었으니 한동안 “토지” 속에 들어가서 생각하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이나 인문학, 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 편이라 그런지 토지는 나에게 신선하고도 무겁게 다가왔다. 이래서 고전이나 인문학을 읽는구나. 눈앞의 이익이나 사소한 것을 셈하는 현대인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사람이란 대체 무엇이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고, 눈앞에 주어진 길만 걷던 나로 하여금 내가 가는 길 옆과 그 너머, 전후에 놓인 세상을 한눈에 두루 보게 만든다.
“토지”에는 흠모할 만한 성품과 인격과 재산과 지식과 지혜와 외모까지 두루 갖춘 고매한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윤 씨 부인을 필두로 서희, 길상, 환국, 윤국 등 최참판댁 사람들이다. 그런가 하면 농민 혹은 종이나 화전민 같은 계층에서도 배운 것이 없지만 사리가 분명하고 마음이 넓고 공명정대하여 신분을 초월해 고귀한 삶을 사는 인물도 있다. 두만네, 용이, 장연학, 기생 월화의 오라비, 김휘, 숙이가 그렇다. 눈길이 더 가고 감동을 더 주는 것은 후자의 삶이다. 경주로 친다면 전자는 몇 백 미터 앞에서 출발한 셈이고 후자는 저 멀리 뒤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뛰는 셈이니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피는 못 속인다 했던가.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라는 거라, 부모가 고귀한 사람이면 자식도 그러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다. 부모 중 하나가 못나도 다른 하나가 올바르면, 자식 중에도 똑바른 인물이 남는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어서 그토록 훌륭한 두만네 집에도 장남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어쩌면 그 아비가 평생 부끄러워 한 단 한 가지 일,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혼자 달아난 사건, 그것을 보고 자라서인지 모르겠다.) 반면, 그토록 사악한 조준구 부부에게서 태어난 병수는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깊고 맑은 심성을 그 눈에 담고 산다. (물론 그는 자신의 삶이 그나마 꼽추라는 형태로 인해 겸손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니 어떤 일도 후회가 없도록 매사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고, 어떤 어려움도 변명할 수 없는 게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무엇이 진짜 “남자” 다운 것인가에 대해서도 정리가 됐다. 요즘은 성별에 의해 성품을 특정하는 것에 차별의 소지가 있지만. 사실 내가 이해하기로 한국에서 본 “남자다움”은 유치한 경우 허세와 자랑으로, 성숙한 경우에는 고집과 독선으로 나타났다. 보통 남자답다는 말을 듣는 남자들에게서 내가 발견한 공통점이 그랬다. 그런데 토지를 통해서 “남자다움”이 새로 정의됐다. 그것은 이용, 이홍, 길상, 환국, 장연학 등에게서 나타나는 것인데, 언뜻 보아서는 남자답다고? 하는 의문이 들 만큼 온유한 사람들이다. 온유. 그것은 단순히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야생마가 훈련을 통해 길들여진 상태이고 고삐 풀린 망아지같이 제멋대로 굴지 않는다는 뜻이며,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고 허물을 입에 올리지 않고 덮어주며 말없이 남성의 역할을 함으로써 필요를 채우고 보호해 주는 것이다.
소설을 덮으면서 내 마음의 소원은 두만네처럼 넓고 공명정대한 마음, 몽치처럼 형체가 아닌 심안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촉수와 세상 무서울 것 하나 없는 대범한 배짱, 송영광처럼 섬세하고 화사한 감수성과 굽힐 줄 모르는 내면의 견고한 성을 잘 유지하는 것, 그리고 정말 남자다운 사람을 한국에서도 발견하는 일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토지“의 무대 일대와 지리산에 가서 흙내음 속 사람냄새를 직접 맡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