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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달 Dec 02. 2020

로마의 자전自傳이 공전空轉할 수밖에 없는 이유

로마(2018), 알폰소 쿠아론, 135분

※영화 〈로마〉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본 후 감상하시길 추천드립니다.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멕시코 태생인 그는 유년 시절 자신을 길러준 멕시코 선주민 가사도우미 리보 로드리게즈의 삶에서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 특정한 시간 속의 인물에 대한 기억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자신을 길러준 이들의 삶을 어른이 된 현재의 시선으로 회고한다. 하지만 감독의 행복했던 추억은 영화에 결정적인 결함을 드러낸다. 역사를 담으면서 인물을 이야기하는 동안 지우고 가려야 할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향수는 환상이 되고, 내밀한 이야기는 동화가 된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모두에게 사랑받지만 냉정한 이면과 공존하면서 희망을 주입할 수는 없어 보인다. 




클레오의 수동성과 불가역적 삶에 대하여

〈로마〉의 오프닝 시퀀스는 클레오가 집 내부의 주차장 타일 바닥에 물을 뿌리며 청소를 하는 장면이다.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타일 바닥을 클로즈업하여 타일의 반복적인 패턴에 집중한다. 어디선가 가까이 들려오는 물소리와 함께 화면의 위에서 아래로 물이 밀려오고 되돌아가기를 반복한다. 이때 물에는 천장이 뚫린 공간 내부를 통해 보이는 하늘이 비치는데, 사각의 프레임 안의 하늘에서는 수차례 비행기가 지나간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에 바닥이 고여갈 때 비로소 카메라는 위를 올려다보며, 물이 빠지는 하수구와 청소를 마치고 도구를 정리하는 클레오를 비춘다. 아래로 물을 밀어내는 클레오와 다시 위로 회귀하는 물의 운동은 영화에서 클레오가 겪는 불가역적인 현실과 이에 반응하는 클레오의 행위 작용을 보여준다. 


클레오는 자극이 와야 반응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그저 다가오는 시간의 조류를 받아들이고 몸을 맡긴다. 그는 주어진 조건과 상황에 즉시 반응하기보다는 언제나 뒤늦게 인식하고 행동한다. 개똥을 치우라는 소피아의 닦달에 빗자루를 들고, 자신의 임신 소식에 남자 친구 페르민이 도망가도 영화의 엔딩까지 앉아 있다가 영화관 밖을 나서서야 비로소 두리번거린다. 페르민을 찾아가 모욕적인 말을 듣고 온 후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남편을 잃은 소피아에게 선수를 빼앗긴다. 고향의 어머니가 정부에 땅을 빼앗겼다는 소식에 그의 첫 반응은 체념이다. 그의 주저함과 체념은 자신이 가진 불가역적 조건, 즉 선주민 출신의 하층민 여성이라는 조건에서 사회를 살아가는 소수자의 습성이자 현실에서 체화된 인식의 발현이다. 바뀌지 않는 조건을 짊어지고 변화할 수 없는 삶을 맞닥뜨리는 클레오의 주된 정서는 아이를 잃을 때까지 지속한다. 카메라는 거리의 민주화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우익 무장단체의 학살의 목격자가 된 클레오의 공포를 담아낸다. 또 수술대 위의 클레오와 끝내 세상 밖에서 심장조차 뛰지 못한 아기를 롱테이크로 함께 담아내며 아기의 죽음에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무력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추억으로 덧바른 사랑과 헌신 

개인에 대한 의도적 집중과 무기력의 부각은 역사와 현실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심각한 모순을 보여준다. 이는 잔인한 현실 속의 클레오라는 인물의 구원이 스스로가 아닌 시스템 내부의 다른 주체에게 이전되고, 그들은 다름 아닌 클레오를 고용한 고용주인 소피아 가족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물에 비친 네모난 하늘처럼 클레오는 현실의 억압과 결핍으로부터 벽을 만들고 단념을 강요받는다. 의식의 자유를 가두고 있는 사각의 벽 외부의 세계로부터 날아오는 비행기는 폐쇄된 세계를 지나치며 무심히 날아간다. 이 결핍과 단절의 공간은 소피아와 그의 아이들이 채워 준다. 아니, 채워 준다고 감독은 믿고 있다. 클레오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소피아의 아이들 한 명 한 명 자신의 언어로 잠을 깨운다. 내가 준 사랑이 아이들로부터 되돌아올 때의 기쁨을 위안 삼아 체념 위에 덧바른다. 하지만 그가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과 헌신은 자신의 세계가 붕괴하는 와중에도 지속하여야 한다. 


클레오의 진심이 상대에게는 단지 고용된 가사도우미의 별도의 친절에 불과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은 영화가 클레오의 찬사가 아닌 착취의 대상인 클레오의 헌신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당장 영화 초반에 아즈텍 어를 쓰는 클레오를 보고 (감독의 분신처럼 보이는) 페페는 못 알아듣겠으니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소피아 가족과 함께 TV쇼를 보는 클레오의 자리는 소파가 아닌 바닥이다. 정면을 향한 바스트 샷은 누가 봐도 행복한 가정이지만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무릎을 꿇은 클레오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태어날 아기의 침대까지 사 주며 선의를 베풀던 테레사는 양수가 터지자 병원에 함께 가서 접수를 돕는다. 이때 그는 클라라의 풀 네임과 가족관계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환자와의 관계는 ‘고용인과 고용주’라고 정확히 명시한다. 영화는 장면 곳곳에서 클레오의 위치를 명확하게 정의한다.


기울어진 유사가족의 결말


그렇다면 영화 후반부에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다가오는 파도를 뚫고 걸어가는 클레오의 행위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차별과 소수자성을 보여주며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클레오의 애끓는 헌신을 찬사하는 감독의 방식은 자신을 키워준 존재는 클레오지만, 클레오에게 희망을 일깨워준 존재는 계급적 우위에 있는 ‘우리‘라는 이중적인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감독의 욕망과 기억이 투영된 영화는 클레오의 삶 위에 감독의 노스탤지어를 이미 펼쳐 놓았다. 클레오가 잉태한 아이의 죽음은 영화 전체에서 이미 여러 암시를 두고 있다. 사실상 결말은 감독과 그의 유년 시절을 책임진 클레오와의 모성과 소피아 가족과의 정서적 친밀감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태아의 죽음은 클레오의 성장을 위한 시련의 단계 중 하나 정도로 의미가 축소된다. 소피아의 자식은 물에 빠져 죽을 수 없다. 그들은 넓은 의미의 감독 자신을 투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관객이 동일시하는 주체의 지점은 선주민 가사도우미의 모성성이 백인 중산층 아이들에게 이관되는 순간의, 공감을 유도하지만 이미 예고된 모성성이다. 


정서적 유사가족의 탄생에는 중요한 선결 조건이 부합되어야 한다. 두 주체는 일차적으로 고용주와 고용인, 백인과 선주민, 중산층과 하층민으로 묶인 계급적 관계이다. 이를 모두 보여준 상태에서는 더이상 연대의 형성만으로 그 간극을 메울 수 없다. 이때의 두 대상은 평등한 관계여야 하며 기울어진 연대는 종속의 다른 이름이다. 〈바그다드 카페〉에서 두 주인공과 새롭게 구성된 유사가족은 사회적 지위에 구애받지 않는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모든 장애물이 사라진 결말은 이상적이지만 그 의도와 주제가 분명하기에 현실성은 충분히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자전적 이야기에 현실을 직시하고 반영하는 영화가 비슷한 결말을 내포한다면 상대적 우위의 주체인 인물과 그들로 대표되는 감독은 미화와 면죄부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아이들을 구해 준 행위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 사건 하나만으로 각성하여 하루아침에 클레오가 동등한 가족 구성원으로 편입되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영화는 소수자-주체로서의 클레오의 삶이 성장하는 과정 이면에 모성과 향수의 대상으로서 객관을 위시한 현실과의 거리 두기를 시도한다. 원치 않는 아이의 사산과 죄책감이라는 고통을 고백하는 순간 모두가 하나로 결합하는 장면은 현재 상황을 사랑과 헌신으로 포장하여 다양한 장애물은 생각하지 않게 만든다. 앞서 정의 내린 클레오의 위치와 연결하면 이 감동적인 장면은 사랑과 모성, 노동을 제공해 주는 대상을 기꺼이 품어주겠다는 시혜적 태도로 보인다. 하지만 남편과의 이혼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정에서 가장 먼저 줄여야 할 ‘지출’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모든 현실을 서로의 사랑으로 품어주는 결말은 매우 아름다우며, 동시에 허탈감을 준다. 영화는 마지막 신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클레오의 모습을 천천히 올려다본다. 스크린 전체에 담긴 하늘에 역시 무심히 비행기가 지나간다. 클레오의 말처럼 ‘해 줄 이야기가 많기에’ 관객에게는 평화와 희망을 암시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지나가는 비행기는 감독이 바라는 희망이자 기억 속의 세계에서의 소피아의 아이들로 대표되는 한가로운 일상일 뿐, 그것이 영화 전반에 초점을 맞추어 온 클레오의 것인가는 불편한 질문으로 남는다. 가구가 빠지고 방들이 재배치되었다 하더라도 클레오의 반복되는 일상은 여전히 사각의 하늘 아래에 있어야 한다. 마지막 ‘Shantih Shantih Shantih’가 큰 울림보다 답답함으로 와 닿는 이유이다.



※참고문헌: “Slavoj Žižek : Roma is being celebrated for all the wrong reasons”, Spectator, January 15, 2019, 8:02 PM, https://spectator.us/slavoj-zizek-roma-celebr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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