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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잠 Aug 22. 2021

방학을 정리하니 무기력이 보인다

수필보단 일기에 가까운 글입니다

수필은 일기와 다르다. 그런데 어디가 얼마나 다른가 따져 묻는다면 명확히 답하긴 어렵다. 단어로 구분되어 왔으니 분명 차이점은 있겠지 생각했다. 글쓰기 장르를 딱 떨어지게 구분하는 것의 효용에 동의하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 너무 너무 심심한 나머지)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지 꽤 오래 고민했고 작은 결론을 내려보았다.

 

나의 이야기를 쓰되 읽어 줄 독자가 있고 그들이 '읽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글


글이 역사의 단편을 훑거나, 소박한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거나, 인류애 흐르는 절절한 감동을 전해 주거나. 독자가 시간을 들여 읽을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면 수필이라 부르지 않나 싶다. 물론 명확한 이유 없이 끌리는 글도 만난다. 다만 그럴 때에도 독서 취향을 뒤적거려 '어딘가 나와 닮아있구나' 정도의 묘한 유대감이나 '그래도 이 사람보단 건강하게 살고 있겠구나' 식의 다소 무책임한 위로를 이유로 찾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글은 일기에 가깝다. 방학 동안 느낀 감정을 정리하고 싶어 쓰기 시작했고 독자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기 쉬운 글이 될 듯하다. 혹시라도 읽는 사람의 시간 낭비가 걱정되어 구구절절 말이 길어졌지만 구독자 수를 보니 괜한 걱정을 했나 싶긴 하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 왜 여기에 쓰냐? 니 일기장에다 쓰지"


술에 취해 하수구를 찾아 구토를 하듯 감정을 배설하고, 솔직함을 넘어 저기 먼 융털까지 뒤집어 보여주는 내 일기장이 수필로 신분상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초등학교 때 일기장을 엿보던 친구들이나, 군대 시절 극강의 찌질함이 담긴 일기를 몰래 읽기 직전 적발된(?) 엄마에게는 수필이었던 듯하다. 글을 쓴 사람의 보이지는 않는 일상을 알고 싶은 마음도 '읽을 가치'에 포함될 수 있으니까. 그때는 왜 남의 일기장은 읽어보려 하는지 기분이 마냥 나빴는데 요즘 생각해보니 이 정도 감각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 같다. 일기보다는 적당히 감추고 자기소개서보다는 좀 많이 솔직한. 숙제로 일기장을 검사받던 시절이나 누군가 훔쳐볼 것을 예상하고 쓰는 느낌의 글쓰기가 익숙하다. 거기에 일기를 쓰다 보면 감정에 매몰되어 나 자신이 세상 시련과 슬픔을 모두 껴안은 드라마 주인공이 되는 과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가두거나 가라앉지 않는 선에서 생각하고 쓰고 싶었다. SNS나 블로그를 하지 않지만 '이번 방학을 돌아보며' 느낌의 글을 써보고 싶기도 했다.




조금 멀리 왔지만 본론으로 돌아가려 한다. 방학을 정리하며 이대로는 안 될 듯한 막연한 불안감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마지막 학기를 앞둔 8월의 끝에 서보니 '개강 파티'보다는 '방학 장례식'이 어울릴 것 같은 시절이란 생각이 든다. 끝의 아쉬움과 함께하는 시작의 즐거움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방학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시험이나 자격증 준비 등 생산적인 목표(?)를 지닌 시간은 아니었다. 토익공부나 그럴듯한 학업계획서 등을 써내겠다는 다짐은 희미함을 넘어 사라졌다. 대학생활을 돌아보면 작은 목표에 과하게 큰 의미부여를 하는 경우는 많았어도 목표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은 없게 하려 노력했는데 이번 방학은 그마저 하지 못했다. '디지털 디톡스를 하겠다!' 당찬 다짐으로 스마트폰 전원을 끄며 쓴 글도 완전히 잊고 살았다. 한여름을 핑계로 에어컨과 함께 꾸역꾸역 이불을 붙잡고 침대로 파고드는 시간이 길어졌다. 굳이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구병모 작가의 '파과' 일부 읽은 것과 스스로도 도저히 알아듣기 힘든 감정을 휘적거린 시 몇 편을 쓴 것, 이옥섭과 구교환 감독의 케미 터지는 단편 영화들이 매우 취향저격이라는 것을 발견한 정도다. (최애는 '플라이 투 더 스카이') 심심하고 처지는 일상을 공유하는 지루한 통화를 이어주거나 면허가 없는 나를 찾아와 가까운 바다로 기분전환 드라이브를 시켜준 고마운 친구들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무기력까지 해결해주길 바랄 순 없었다. 나의 몫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채 해결의 주체를 외부에 과도하게 의지하면 결국 후회로 남는 감정을 치우는 시간이 길어짐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무엇 때문에 무기력을 느끼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렇게 나쁘게만 볼일인가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나의 무기력은 스스로 갉아먹는 것과 쉽게 연결되었다. 우선 열등감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마저 편하게 쉬지는 못한다.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고민만'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열등감으로 쉽게 이어졌다. 피해의식과 열등감은 친구처럼 함께 사는 편이라서 보통은 가장 좋아 보이는 모습이 올라오는 SNS는 시작할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 틈에서 사라진다는 느낌은 문득 두려워져 클럽하우스를 기웃거렸다. 창의적인 활동과 관련된 자신의 전공은 2개라는 제목의 방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삶의 자세나 태도가 멋있는 사람들이 왕왕 많다고 느껴 나도 껴보고 싶어졌다. 처음으로 용기를 내 스피커가 되었고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문득 나는 전공이 하나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음악이나 영화 등을 기웃거리긴 하지만 전공이라고 보기 매우 민망한 수준이고 관심 있다는 글쓰기도 그나마 '전문성'을 갖추었다고 볼만한 것은 브런치 작가라는 사실 뿐이었으니 목소리는 더욱 줄어들었다. 왜 그 방에서 이야기하려 했을까 아직도 후회할 정도로 초라해졌다. 자신감도 내용도 크게 없는 소개를 하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길 바라는 것은 이상한 욕심이었고 조용히 지나가 버린 소개 시간에서 열등감을 느꼈다. 스스로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같이 있는 사람이 다들 잘났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으로 곡해했다. 지금 생각하면 대상자가 아니면 듣기만 하면 되는 문제고 어쩌다 이야기까지 했다면 굳이 열등감까지 느낄 건 뭔가 싶다. 무기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잠시 빛나 보이는 것에 끌렸고, 불필요한 부끄러움과 얼굴 붉힘이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자격의 우열을 비교하며 가리는 것으로 커진 순간이었다.




나의 무기력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오래 고민하게 하기도 한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 학기 중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있었다. 이유가 명확하지 않게 연락이 끊어졌는데 그 친구는 나의 잘못으로 연락이 끊어졌다는 논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심하고 찌질한 감정과 그로 인한 잘못으로 친한 사람을 많이 잃었고, 그것을 후회하는 시간을 보냈던 나는 미안함에 우선 사과했다. 다음 날에도 연락해 기분 나쁜 부분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다시 건네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나만의 문제인 것인가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긴 어렵지만 다른 친구 몇몇에게 고민을 이야기해보니 누군가의 잘못 보다는 관계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변화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생각을 약간 바꾸었다. 과거를 붙잡아가면서까지 매몰되지는 말자고. 학기 중에는 정리해둔 기억이 방학의 무기력한 순간과 더해지자 무방비하게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멍하니 보내는 시간은 새벽을 쉽게 거치기 마련이다. 멀어진 인간관계에 대한 미련과 집착, 불필요한 기대 등 떨쳐내기 힘든 순간들이 번져가기 좋은 조건이었다. '만약에' 놀이를 하면서 과거로 자꾸 수렴되었고 붙들리는 시간을 보냈다.




이번 방학의 무기력은 중독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타성에 젖어들기 쉬웠고 시간이 길어지며 부작용이 늘어갔다. 이렇게 정리하고 글로 써보니 혼자 끙끙거려도 바뀌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무기력감이 무력감까지 커지기 전에 목표를 정해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성장하고 싶은 부분을 고민하여 실행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차오른다. 마치 1월 1일을 앞둔 신년 계획처럼. 작심삼일로 끝나기 쉬운 다짐이겠지만 10번이 쌓이면 한 달이 되는 것 아닌가. 일단은 무기력에도 무기력함을 느끼는 놀라운 상황에서 벗어나기로 다짐한 것이 가장 좋다.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시작한 클럽하우스에서는 글쓰기를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클럽을 만났다. 기숙사에 올라오며 이용이 불편해진 어플을 지우게 될 것 (SNS가 잘 맞지 않는 이유가 더 크지만) 같다고 전하자 먼저 연락을 건네주며 관계 유지에 대한 기분 좋은 기대를 연장해준 고마운 사람이 떠오른다. '이런 사람도 있으니까 지나간 인연은 괜찮아' 식의 대체성 담긴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에 다른 감정은 종종 바뀌곤 하니까, 무기력도 조금은 쉽게 바라보고 싶다. 대학에서 마지막 방학을 정리하니 무기력만 보이는 건 좀 아쉽지만 그래도 어쩌나 이미 흘러간 일인데. 덕분에 묵혀둔 감정도 정리했고 오랜만에 글도 썼으니 좋다고 생각해야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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