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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잠 Jan 16. 2024

나로 살아가기

석사 논문도 안 쓰고 돌아보는 석사 생활

  12월이 되었고, 여느 때처럼 춥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올해의 겨울은 언제는 가을이었다가 잠깐은 봄이었으며 그렇게 돌고 돌아 최근에야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온 것만 같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일교차 때문에 주고받는 메일 속 “건강에 유의”하라는 걱정은 더는 형식적인 안부 인사가 아닌 듯하다. 정말로 주변에는 잦은 기침과 콧물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겨울에 대한 유보의 시간은 최근 살을 에는 추위에 대한 감각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옷깃을 서둘러 여미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추워질 수 있을지 걱정과 이렇게 ‘변화하는 겨울’은 결코 적응할 수 없을 거란 쓸데없는 확신들로 걸음을 재촉한다. 여름의 더위를 기억해 보며 무엇이 더 나은지(나았는지) 선택하라는 시시한 질문도 떠올려 보지만, “추워 보니까 더운 게 좋았다” 같은 뻔한 대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똑같이 고통스러울 것이라면, 그래도 빨래가 냄새나지 않은 채 잘 마르는 춥지만 건조한 겨울이 더 낫지는 않은가? 생각한다. 이미 정해진 답을 묻는 일방적인 질문보다 내가 더 시시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하게 되는 연말이다.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 속에서도 연말 느낌을 내기에는 허허 입김을 내뱉을 수 있는 날씨만 한 것은 없다. 나에게 ‘연말 느낌’은 추워서 잔뜩 웅크린 채 해야 할 일을 미루어두고 스스로를 쓰는 일로 도피하라는 외침이다. 분위기는 추위를 얼마나 자각하게 할까, 아니면 추위가 존재하지도 않는 연말의 느낌을 억지로 만들어가고 있을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떠올린다. 여전히 오늘도 모르는 것만 늘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쓰는 것을 멈출 수 없기에 다시 무언가 더 배워야 한다고 다짐할 뿐이다. 배워야 모르는 것도 예쁘게, 잘 모를 수 있을 테니까. 한편으로는 나에 대한 것인데 어찌 모르는 것들만 있을까 싶기도 하다. 부족하게나마 설명하면 그럴듯하게 아는 것처럼 포장할 수 있지는 않을까. 크리스마스나 새해의 이미지가 매해 조금씩 달라지지만, 어쩌면 무엇인지는 모르겠을 대상이 분명 무뎌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연말은 늘 조금씩 서글퍼진다는 점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설명할 수 없지만 말하고 싶은 것들이 늘어간다는 것은 써야 할 때가 왔다는 뜻이고, 계절의 탓만은 아니겠으나 한 해의 마무리와 또 다른 해의 시작이라는 털어내고 비워내고 정리하는 글을 쓰기 좋은 핑계의 시간이 찾아왔으니, 미뤄두었던 대학원의 석사 생활을 정리한다.


  현대소설을 전공한다고 시작한 대학원 생활이지만, 이상하게도 지난 2년 석사과정을 회상하면 학원 강사를 하며 경험한 생각의 순간들이 우선 떠오른다. 평일 대학원과 주말에 학원 강사를 병행하는 것은 사실 고통에 가깝다. 오래 서 있어야 함은 둘째치고, 물리적으로 부족한 공부 시간은 제대로 못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정신적인 불안감으로 쉽게 이어진다. ‘제대로 된’ 철학적 기반과 그에 따른 성찰도 없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성장! 성장!’ 서사에 염증이 나다 못해 증오가 느껴지는 입장에서 새벽 5시에 일어나 학원 강사도 공부도 모두 훌륭하게 해내었다는 누군가의 경험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여기에 생각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종종 물리적으로 터지는 상상을 하는 나의 이야기 몇 개를 섞으면 노력은 하지도 않으면서 꽤 찌질하게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연민 서사가 완성될 것만 같다! 학원 강사 생활은 남들이 말하는 그리 ‘성공스러운’ 과정을 통한 입시를 겪지 않았다는 자책이나 묘한 열등감 끝에 자리한 ‘학벌’을 매 순간 자각하거나, 동시에 선생의 자격은 대학 입시의 달성 여부가 온전히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회가 변화할 수 있고, 변화해야 한다는 지나친 낙관에서 비롯된 확신과 철없는 반항이, 이미 내면 깊숙하게 자리 잡은 낡디 낡은 꼰대 같은 사상들과 반복 충돌했다. 학생들이 한없이 힘들고 안쓰럽게 보이다가도 “그래도 대학은 잘 가야지?” 등등의 발언을 뱉은 날이면 돌아오는 버스에서 몇 시간이고 울다가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치고 했다. 이렇게 써두고 보니 정말로 정신에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나를 만들어간 시간이기에 기록한다.


  한편으로 세상에 이 정도 강도의 노동으로 이 정도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은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대학원 생활을 하며 보통 등 따습고 배불러야 떠드는 가치를 말할 수 있는 경제적 상황임에 감사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대학원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은 단지 수반될 뿐이며, 근원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느끼는 감정은 나의 상황에 대한 비겁한 안도이자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저급한 불안감이었다. 요즘은 공감 잘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할 수 없다는 사실도 점차 깨달아 가고 있다. 나는 나의 이기심에 공감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처럼 타인의 삶과 내 삶을 직접 비교하는 일도 “성장! 성장!“ 서사를 강요하는 사회에 나를 맞추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처럼 딱히 세련된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단순히 누군가의 삶의 비교와 그 안에 자연스럽게 나누어지는 우위를 경험하는 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저 누군가가 지워지고 있고 사라져가고 있음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그러한 시도를 포기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설령 아주 적은 사람만 이야기하며, 그것이 ‘돈’을 얼마나 ‘잘’ 만들어낼 수 있겠냐는 비아냥을 들을지라도. 스스로 훼손하지 않고, 시혜적 관점에서 건방지게 굴지 않는 방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연대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요즘 진정 배우고 싶은 가치다. 이는 적어도 대학원 사회 안에서는 주변에 설명하지 않아도 대다수 공유하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며,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세상 속에서 많이 보고 많이 들었으며 꽤 행복했다.


  이쯤에서 인문대 대학원생은 무엇을 하기에 한량 노릇만 하고 있나 자조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지금까지의 경험은 연구자로서의 정체성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것들이다. 내가 경험한 주변의 대학원생들은 자신의 열망을 해소(?)하기 위해 특정 단체를 후원하거나, 활동가와 연을 맺고 그 이야기를 듣는 청자의 관점으로 연구자와 활동가 사이의 경계를 살아가는 것이 보통인 듯하다. 물론 대학원은 생각보다 매우 다양한 사람이 모여드는 사회이기에 함부로 ‘보통’의 사람을 요약해 내기는 어렵다. 예컨대 활동과 연구를 병행하거나,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연구자의 것을 약간 섞어 살아가는 사람들도 존재하며, 논문을 쓰며 ‘연구하는 삶’과 자신의 ‘정치적, 철학적, 인문학적 관점에서의 삶’을 전혀 관련 짓지 않고 살아가는(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상술했지만, 이들에게는 설명하지 않아도 공유하고 있는 가치들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스스로 대학원과 대학원 밖의 삶을 구분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 되었다.


  지난 명절에 의대를 가겠다며 재수에 3수를 거듭한 사촌 동생이 마르크스와 같이 실패한 사상을 왜 오늘날까지 공부하느냐고 물었다. 지금 와서 보면 그에게는 입시 실패에 대한 열등감이 강하게 느껴졌으며, 대학이라는 공간에 대한 특히 의대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의 과정 예컨대 ‘시대인재(의대를 목표로 하는 입시생이 주로 모이는 재수학원)에 들어갈 정도로 의대생이 될 가능성이 높은 본인’ 등으로 정체화했던 감정이 터져 나왔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이 무언가를 폄하하고 지우는 방식으로 실현되는 것이 문제였지만,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전무한 상황에서 대화를 피해야 했다. 피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으니까. 술에 취해 잔뜩 흥분한 채 소리 지르며 맞싸운 나도 여전히 어리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대강 이야기는 끝난다. 대수롭지도 않고 창피하기만 한 이야기. 하지만 아직 화가 나고, 가슴에 남아 이렇게 글을 쓰는 까닭은 그 친구의 말하기 태도 때문이었다. 자신이 굉장히 합리적이고, 지적이며,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믿는 태도. 스스로 세상을 향한 중립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분노가 담겨있으며 결국 영영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발화가 완전한 자유가 될 수 있다고 믿는 태도. 오늘날 한국 사회를 뒤 감고 있는 ‘왜곡된 공정’과 ‘훼손된 정의’의 결정체를 20대 초반의 남성이 쿨한 척 내뱉고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분노가 느껴진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배우지 못해 드러나는 무식한 태도가 너무 역겨웠다. 단순히 많이 알고 머리에 단편적인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자신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사고하는지 단 한 순간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근본도 없고 맹목적인 확신에 대한 목도는 이미 경험치 속에도 차고 넘치는 것들이라 그 친구와 재확인하고 싶지 않았고 아주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 물론 앞으로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과 어떻게 대화할지 고민도 해보아야 하겠지만, 당장은 답답하고 짜증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설명 없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지금 이곳이 ‘돈’ 말고는 걱정할 것이 없이 행복한데 굳이?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 ‘돈’ 되는 일에 열심히 시간을 쪼개면서 눈물 찔찔거리며 살아가는 모습도 또 다른 현실이기에 짜증 나는 인물들과 대화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살아가야 하겠지만.


  대학원에서의 읽는 여러 텍스트와 수업에서, 하다못해 지난한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의 식사와 술자리에서도, 본질적인 질문을 당연하게 던지고 서로의 대답을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럽다. 성장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성장은 무엇인가? 그 성장의 출발과 끝에는 무엇이 있으며, 우리는 왜 성장했어야 했고 왜 끝없이 성장해야 하나? 성장하지 못한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니 설명할 필요가 있는가? 끝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재미있는 세상 속에 살다 보니 이런 대화가 가능하기까지 나의 일방적인 (상대가 동의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말하기와 설명이 필요한 상황을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전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어야 하는 과외선생은 아니지 않은가. 거만해진 태도가 걱정되지만, 또 내일의 나가 바꾸어 나갈 것은 바꾸어 나가는 것으로 하고 우선은 잠시 까불어 보련다. 물론 이는 내가 전적으로 옳다는 의미의 자기연민 가득한 서사를 쓰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다.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대학원에 오기 전까지는 ‘감정적인 나’로 인한 자리의 망침, 관계의 해침, 예민하고 과도하게 반응하며 ‘정상적이지 않은 나’로 대다수 사람에게 또는 스스로에 의해 규정되었거나 규정했다. 단지, 성숙한 이성과 대비된 열등한 감정 그리고 ‘정상적이지 못한’ 면모에 대한 자기변명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대학원 생활이 알게 해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 감정은 이성보다 열등한 것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 굳이 장황하지만, 세련되게 설명하는 저작들과 논문들 그리고 동료들 틈에 살아가는 순간들은 보통 행복했다. 보통의 시간 동안 행복한 내가 될 수 있다면, 건방지고 거만한 태도쯤이야 뭐 대수인가 싶기도 하련다. 그저 남들을 해치지는 않을 정도까지. 물론 내가 ‘다수’와 ‘이데올로기’와 ‘보이지 않는 권력’에 숨어 누군가를 해쳤고,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고 경계하며, 동시에 나를 비롯한 누구까지를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현명하게 지켜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자세는 필요하겠지만.


  하고 싶은 말들이 많다. 어쩌다가 석사 논문으로 100년에 전에 활동한 이효석이라는 작가의 소설 속에 ‘돈’의 미학적 표상을 연구하고 싶어졌는지 설명하고 싶기도 하고, 아니 그전에 정말 논문이란 것을 제출할 수는 있을지 심각하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떠들고 싶다. 그러고 나면 허황한 이야기로 넘어가 박사과정은 갈 것인지 그렇다면 뭐 해 먹고 살 예정이며 무엇을 향해 ‘성장’할 것인지 꼰대스럽고 현실감 넘치는 생각들도 공유해 보고 싶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근본도 없고, 출처라고는 ‘다수’ 밖에 없는 더러운 생각이 옳다고 강력하게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기도 하다. 존경하는 선생님들은 “정치적으로 급진적 진보를 표방해도 선거 때에는 윤석열을 찍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시지만, 여전히 이러한 진리를 수용하기에는 어린 것 같다.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도 분명하게 내안에 존재하고 인문학 전공자로서 갈 갈이 아주 아주 멀다. 그래도 일기장으로 생각하기로 했으니 주절주절하고 싶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앞으로도 털어둘 셈이다. 계절은 돌고 도니까 언젠가 추워질 날들을 핑계 삼아 쓸 날이 오겠지 싶다. 그리고 돌아오는 계절에는 조금 더 나아진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까 바라본다.


  오늘은 이만 줄이며, 언젠가 다시 돌아올 나를 위해약간의 다짐 정도를 남겨둔다. 적어도 나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러한 위협이 노골적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숨겨져 있거나 아니면 어떠한 의도도 없이 순수한 것인지는 크게 관심 두지 않겠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때 모든 행동에 대해 의도를 매 순간 먼저 생각하고 살지는 않지 않은가. 이제는 한참 싸우고 난 이후에 상대가 건네는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는 의도”를 확인하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중에 본인 뜻대로 부여되고 구체화 된 의도를 규명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며 나 스스로 세밀하고 합리적으로 똑똑하게 분석하고자 할 뿐이다. 그것이 소설이거나 누군가의 삶이거나. 아니면 그렇게 구분되지 않는 무엇이거나. 나는 나로서 살아갈 준비를 대학원에서 비로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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