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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이 Nov 07. 2017

저도 사람입니다.

#75. 사회는 약자의 편이 아닌 항상 강자의 편이다.

카베아트 엠프토르. 어느 책에 나온 단어이자 내 마음속에 들어온 단어. 라틴어이며 뜻은 '매수자 위험 부담'이란 뜻이라고 하는 이 단어. 세상 모든 것이 카베 아트 엠프 토르. 내가 선택하는 것 또한 저 카베 아트 엠프 토르임을 알고도 하는 것이다. 직장 역시 그러하다. 계약직으로 계약 후 1년 후 정규직이라은 조건 제시와 연봉 제시, 출퇴근 시간이 있고 주어진 업무가 있다. 그 모든 것을 알고도 계약하는 것은 내 선택이다. 매수자인 내가 그 모든 위험 부담을 안고 계약을 하지만 이번에는 혹시나 하는 생각과 희망을 품어보지만 결국 사회는 사회다. 사회는 언제나 항상 약자의 편을 든다고 하지만 막상 깊게 파고들어가 보면 결국은 강자의 편에 선다. 약자는 항상 약자일 수밖에 없고 항상 당할 수밖에 없다. 더 무서운 것은 약자였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조금의 힘을 쥐어 주면 결국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자신이 받았던 것과 똑같은 힘을 휘두른다.



나 역시 사람이다.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사무실에 사람이 없으면 그 사람들끼리 서로 배려하며 뭉쳐야 한다. 하지만 결코 힘은 평등하지 않다. 내가 배려하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 받은 사람은 그만큼 돌려줬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공평하지 않다. 워낙 많은 일을 겪었기에 거기다 이번에는 그동안의 처지와 다르기에 참고 참았다. 결국 쌓이고 쌓이다 터져버렸다. 면담을 요청했고 그동안 쌓인 것들을 모두 다 얘기했다.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진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 전 직장에서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그때그때 다 말해왔고 그로 인해 안 좋았기에 이번엔 참았다. 남들이 들이박으라고 할 때도 나는 참았다. 가만히 있었더니 이번엔 호구가되었다. 면담 역시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대화로 좋게 풀리기를 원했지만 앞에서와 뒤에서 하는 말이 달라짐을 느꼈고 더 높은 책임자와의 면담에서 퇴사하겠다고 얘기했다. 쉬고 나와 방안을 찾자고 했지만 같이 일하는 상사는 마음대로 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마디로 퇴사하던가 말던가 알아서 해라 나는 상관없다 라는 식이었다. '나는 너에게 실망했다. 이 정도 일로 힘들다고 할 줄 몰랐다.' 라니.

나도 사람이다. 사람이 해주는 한마디 말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일이 몰리면 힘든 것은 당연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이 짊어져 줄 줄 알았지만. 예전엔 더 바빴고 자신은 놀았냐고 반문하는데 할 말이 없다. 그 사람이 바빠 보여 내가 하나둘씩 가져온 일이 나중에는 결국 당연하다는 듯 나에게 넘어오는 상황도 어이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일이 없어 쉬고 있을 때는 자신의 일을 나눠 줘도 될 것을 싸안고 있다가 닥쳐올 때서야 나눠주는 것도 불만이었다. 있는 얘길 다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대답은 자신은 예전에 그러지 않았다. 과거를 비교하는 순간 끝났음을 직감했고 당일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 계약직 10개월 만의 일이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정규직을 달고 더 당당해졌을 테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이 과거 자신이 일할 때와 비교하는 순간 끝났음을 직감했다.



퇴사를 하고 종종 일할 때 마주쳤던 사람들에게 연락이 온다. 힘들어서 그만뒀다고 소문이 났다고. 할 말이 없다. 내가 힘이 들어서 그만뒀다면 사무실이 이사를 하기 전, 아니 그보다 더 전인 재건축사업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전인 신입으로 들어간 지 1달 만에 그의 사정으로 거의 일주일을 혼자 근무해야 하는 상황이었을 때 그만뒀을 것이다. 일이 힘든 것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서 오는 스트레스는 그 어떤 것으로도 풀 수없다. 심지어 별 일이 없을 때 하루 휴가를 쓸 때도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다. 이미 그에 의해 한 달 뒤로 미룬 휴가임에도 불구하고 휴가계를 제출할 때 '별 일 없길 바랄게'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휴가계를 제출했었다. 사람의 말이란 '아'다르고 '어'다른 법이다. 휴가를 쓰는 상황이 못마땅하더라도 휴가계를 허락을 했다면 기분 좋게 보내줘도 모자랄 판에....



마지막으로 선택한 이 직업에 이제는 올인하겠다고 생각한 시점에 또다시 일이 발생했다. 이젠 주변의 지인들도 혀를 찬다. 다른 사람들이 한번 겪을까 말까 한 일을 왜 너 혼자 다 겪냐고. 나도 답답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프리타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프리타란 (프리 + 아르바이터)의 합성어이다. 요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4년제를 나오고 직장을 들어가 봐야 월급에 비해 턱없이 많은 노동 시간, 그리고 주어지지 않는 휴식. 자신이 한 잘못이 아님에도 뒤집어쓰고 자신이 한 일임에도 자신이 했다고 얘기할 수 없는 상황. 드라마에서 나오는 상황들이 모두 현실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 현실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경까지 오고 나니 나도 많은 생각이 든다.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이나 아르바이트생이나 어차피 다 똑같은 생활이다. 아르바이트생이 직장인들을 보면 뭐가 똑같은 생활이냐고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차피 남의 돈 받고 일하는 건 직장인이나 아르바이트생이나 똑같다. 아니 어떻게 보면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이 나라를 떠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옳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회사에 들어가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으면서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받느니 시급을 받는 만큼 일해주고 퇴근 후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맞는 것일 수 있다. 물론 프리타들은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기에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느 정도 돈이 모이고 난 후일 수 있으나 그것은 직장인도 마찬가지. 자신이 번 만큼 쓴다는 공식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이제는 생각에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그저 강한 분노만이 자리할 뿐이다. 언제나처럼 당당히 사표를 제출했으나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던 희망을 품었던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인지 분노인지는 모르지만 30살에 사표를 제출하고 길거리에서 전철에서 울면서 걸어 다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집에서 쉬는 요즘 회사 이사로 인해 병원을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지금도 그저 답답하다. 왜 이런 상황들이 나에게만 닥치는지. 정말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이번에는 곳곳에서 조언을 구했고 그 조언들을 조합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진행했지만 문제는 역시 받아들이는 사람과 나의 거리였다. 이번에도 나는 현재 내 상황에 대해 힘들다고 얘기했지만 나는 당연히 참고 버틸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고 그 기대감을 못 채웠다는 이유로 나는 또다시 실망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 말대로 내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도 못한다는 식으로, 그리고 아프지 않아도 아픈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인지. 한마디로 너무 씩씩하게 모든 일을 묵묵히 해내면 안 되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일을 함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보여주면 왜! 도대체 왜 그 이상을 원하는 것인지. 일을 하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없는 이 상황들이 답답하기만 하다.

앞으로 내가 또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이제는 어떤 것에 또다시 도전하기가 두렵다. 카베아트 엠프토르. 이 단어의 무서움을 몸소 느끼는 중이다. 위험부담이 커도 너무 크다. 그렇기에 매수자는 항상 약자이고 사회가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회는 약자의 편이 아닌 항상 강자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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