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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가 사랑한 것들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명작

by 우리마음

1. 오리알을 구한 어미백조

부리가 유난히 황금빛이어서 ‘노란 부리’라고 불리던 어미백조가 있었다. 노란 부리는 잘난 체하기 바쁜 다른 백조들과는 다르게 넓은 마음씨를 가졌다. 그런 노란 부리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갓 태어난 아기백조가 있었다.


어느 날 아기와 먹을 것을 찾아 나선 노란 부리는 저 멀리 몸통이 굵직한 뱀 한 마리가 몸을 움직이는 것을 봤다. 뱀이 향하는 곳에는 오리 둥지가 있었는데, 갓 태어난 듯한 뽀얀 알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아가, 여기에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


노란 부리는 주저할 것 없이 날개를 푸덕이며 둥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부리로 잽싸게 오리알을 물어 들고 도망치려는 찰나, 맞은편에서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오던 뱀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가! 어서 집으로 돌아가. 백조 무리가 있는 곳으로!”


노란 부리는 찰나의 순간 아기백조에게 외쳤고, 아기백조는 본능적으로 도망쳤지만 그것이 아기백조가 들은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2. 엄마는 없지만 사랑은 있어


아기백조는 무리의 보호를 받아가며 무럭무럭 자랐다. 하지만 ‘보호’가 늘 좋은 뜻은 아니었다. 무리는 아기백조를 절대 혼자 두려고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정한 것들 빼고는 모두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무리는 늘 정해진 길을 따라서 늘 가던 연못에서 똑같은 수영을 하고, 늘 먹던 곤충을 먹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그랬다.


그러나 아기백조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다양한 것들을 사랑하고 싶었다. 잔잔한 수영도 좋지만 두 날개로 마구 물장구를 칠 때 시원한 물이 부리와 얼굴에 흩뿌려지는 느낌을 사랑했다. 어른 백조들은 수영은 좋은 것, 달리는 것은 하찮은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아기백조는 물도 좋지만 두 발을 감싸는 땅의 안정감 또한 사랑했다.


그런 아기백조가 사랑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수영을 마치고 무리와 함께 집에 도착하면, 친구들과 달리 아기백조는 엄마 없는 빈 둥지에 들어가 앉아야 했다. 아직 너무 큰 둥지에서 혼자 긴 밤을 보내야하는 것. 그것만은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기백조는 매일 잠들기 전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엄마는 없지만, 그 누구보다 사랑은 있어.’


'치르치르' 풀벌레 소리가 여름밤이 깊었음을 알리던 어느 날 밤, 아기백조는 빈 둥지에 앉아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일은 연못 말고 호수로 가보는 거야.’


아기백조는 오래전부터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어른 백조들은 몸집이 작은 동물들과는 말을 섞지 말라고 했지만, 아기백조는 다람쥐 가족이 연못에 물을 마시러 올 때마다 ‘호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호수는 연못보다 훨씬 크고, 맑고, 아침에는 물안개가 끼고, 저녁에는 하늘과 하나가 되듯 노을을 품을 만큼 웅장한 곳이라고. 이 작은 연못 뒤쪽에 있는 ‘검은 숲’만 지나가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기백조의 심장을 뛰게 했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 잠에 들기 전에 아기백조는 무리를 떠나 꿈에 그리던 호수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동이 트기도 전인 이른 새벽, 몰래 무리가 있던 풀숲 집을 나섰다.




3. 숲의 딱따구리와 절름발이 사냥개


아기백조는 처음으로 무리와 늘 가던 길을 벗어나 검은 숲으로 향했다. 해가 뜨지 않아 숲은 평소보다 더 시커멓게 보였지만 아기백조는 용기를 내어 숲 안으로 들어갔다.

연못가와 풀숲만 오갈 때는 본 적 없던 키가 크고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아기백조의 귀에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얘, 아가, 어서 피해! 사냥 시간이야.”


아무리 둘러봐도 목소리를 낸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멀리서 ‘왈, 왈’하는 처음 듣는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 저런…! 절름발이 사냥개가 곧 도착하겠어. 여보, 저 가여운 아이를 일단 데리고 올라오자.”


푸드덕하고 딱따구리 두 마리가 높은 나무에서 날아 내려오더니, 아기백조의 목덜미를 부리로 함께 집어 물고는 그대로 다시 날아올랐다. 아기백조는 두 발이 땅에서 떠오르는 생소한 느낌에 가슴이 간지러웠다. 딱따구리 부부와 함께 나무 구멍에 앉아 아기백조는 생전 처음 멀어진 땅을 내려다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왈, 왈’하는 소리가 어느새 발 밑까지 가까워졌다. 딱따구리 부부와 아기백조는 구멍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이리저리 냄새를 맡는 덩치 큰 사냥개를 내려다봤다. 자세히 보니 사냥개는 한쪽 다리를 절면서도 익숙한 듯 움직이고 있었다.

냄새 맡기를 멈추고 사냥개는 익숙한 듯 고개를 들어 말을 건넸다.


“어이, 딱따구리 커플. 오늘도 정말 못 봤어? 어라? 못 보던 얼굴인데.”


그렇게 한참을 아기백조를 올려다보던 사냥개에게 딱따구리 부부가 날개를 푸덕이며 경고를 보내자

사냥개는 이내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쉬었다.


“가만 보니 내 사냥감이 아니니까 안심해. 내 주인은 오리를 원하거든”


사냥개는 아쉬운 듯 주변을 뱅뱅 돌더니 이내 절뚝이며 나무를 떠났다. 딱따구리 부부가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구멍을 나오려던 그때, 이번에는 사람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이 개가 또 사냥은 안 하고 어디로 간 거야. 오늘도 잔뜩 매를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날만 밝으면 기필코 팔아넘겨야지. 쓸모없는 개 같으니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도 사라졌다. 그제야 아기백조는 고개를 들었는데 땅만 볼 땐 몰랐던 아름다운 숲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멀리서부터 해가 뜨고 있었다.

아기백조는 날이 밝은 것을 지켜보다가 문득 사냥개를 구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은 딱따구리 부부는 기겁을 했지만, 이내 아기백조를 사냥개가 사는 농장으로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다.




4. 따뜻한 마음


“여기서부터 우린 같이 가줄 수가 없단다, 아가야.”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아기백조보다 앞서 날아가며 길을 안내해준 딱따구리 부부가 땅에 착지하며 말했다.


숲을 통과하니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너른 초록 들판이 나왔다. 그 가운데쯤 낡은 울타리가 둘러싸고 있는 농장이 하나 보였다. 아기백조는 짧은 다리로 온 힘을 다해 걸었다. 수영을 하면 더 쉬었을 테지만 불평할 시간도 없이 앞만 보고 나아갔다.


이윽고 농장 울타리 앞에 도착한 아기백조는 나무판자 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다행히 새벽에 봤던 사냥개가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아기백조는 작은 날개를 뒤로 젖히며 있는 힘껏 외쳤다.


“사냥개! 도망쳐!”


사냥개는 곧바로 경계하며 몸을 일으켜 세우고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누구야. 감히 주인장도 없는 농장에 들어온 놈이!”


높은 나무에 있을 때는 몰랐던 사냥개의 날카로운 이빨을 본 아기백조는 겁이 났지만 다시 한번 용기를 내 외쳤다.


“사람이 너를 때리고 팔아버린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


아기백조의 말에 사냥개는 또 한 번 이빨을 보였다.


“그건 언제나 그랬어. 내가 사냥을 잘 못해서 그런 거야, 상관 마.”


바로 그때 울타리 반대쪽이 열리더니 농장 주인과 또 한 명의 사람이 기다란 몽둥이를 손에 들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지금 도망쳐!”


주인장이 한쪽 손에 든 몽둥이를 공중 높이 쳐들었고, 그 순간 울타리 위로 사냥개가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울타리 바깥으로 착지한 사냥개의 입에는 바구니가 물려 있었다.

사냥개는 바구니에 아기백조를 태우고 손잡이를 입에 물고 그대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아기백조는 생전 처음 땅에서 그토록 빨리 달려봤다. 풀들이 빠르게 옆으로 지나가고, 바람이 아주 셌다. 사냥개가 발을 저느라 달리는 모양새가 한쪽으로 기울긴 했지만, 그렇게 빨리 달려본 백조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농장이 안 보일 정도로 먼 곳에 이르자, 사냥개는 자신이 사냥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냥감을 놓아주기 일쑤였다고 털어놓았다. 자기 같은 절름발이에 마음 약한 사냥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했다.

아기 백조는 사냥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따뜻한 마음씨를 필요로 하는 곳이 훨씬 많을 거야. 더 넓은 세상에는!”


그리고 다시 바구니에 들어가 앉았다.


“너의 빠른 걸음과 따뜻한 마음이 나는 벌써 필요해. 나를 호수에 데려다 줄래?”




5. 호수


사냥개는 절뚝이지만 단단한 걸음으로 들판을 가로질렀다. 호수는 생각보다 멀리 있어서 몇 번의 밤을 들판에서 보내야 했는지 모른다. 전부 셀 수는 없었지만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바람이 차가워졌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사냥개가 있어서 아기백조는 깊은 밤이 무섭지 않았다. 빈 둥지보다 사냥개의 옆구리 어느 께에 기대어 자는 것이 훨씬 좋았다.


얼마를 더 갔을까, 아기백조는 다리에 전보다 힘이 생긴 것을 느꼈다. 사냥개는 더 이상 뛸 수 없어 아기백조와 걸음을 맞추어 가던 그때, 눈앞에 시릴 정도로 푸른 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호수였다.


해가 지기 시작한 때의 호수는 듣던 대로 노을을 품은 듯 점점 황금빛으로 반짝여갔다. 작은 연못에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그 풍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잔잔하고 아름다웠다.

그 날, 사냥개는 마치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호숫가에서 낚시를 하던 한 가족의 손길을 웬일인지 받아들이더니, 이 말을 남기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고마워, 덕분에 더 넓은 세상을 찾았어.”


혼자 남은 아기백조는 천천히 호수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꿈에 그리던 호수에 몸을 담그려던 아기백조의 눈에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모습을 본 아기백조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엄마…!”


아름답게 자란 아기백조는 호수를 떠나지 않았다. 그 후로 호수에는 하나, 둘 더 많은 동물들이 모이다가, 나중에는 새로운 백조들도 한 두 마리 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잘난 체하거나, 다른 친구들을 무시하는 겉만 아름다운 백조는 호수에 머물 수 없었다.

백조들은 아기백조를 중심으로 헤엄쳤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나중에는 그 호수를 '백조의 호수'라고 부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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