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구나 살아가면서 실수를 한다. 제 기준에 커다란 사고를 치기도 한다. 일상과 사고, 안락과 권태 사이로 시간이 흐른다. 적당히 잊으면서, 견딜 만큼 기억하면서 산다. 크고 작은 오류로 가득하더라도 우리는 어떻게든 오늘을 살아간다. 내가 받은 상처와 남에게 준 상처로 마음 여기저기를 긁히고, 차마 아물지 못한 상처는 짓무른 채로 산다.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인생이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완전무결한 인생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만날 수 있는 전설 속 동물과도 같지 않은가. 이미 망해버린 ‘나’와 내가 살아온 ‘인생’을 리셋하고 싶지만 불가능하다. 시간을 돌릴 수는 없으니까. 다시 태어날 수도 없으니까. 한 사람의 인생에도 수많은 결점이 있는데, 수많은 사람이 모인 세계에 셀 수 없는 결점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미 망해버린 세계에 태어났다면, 그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폭력과 착취, 환경파괴, 동물과의 공존방식 등 세상을 둘러싼 문제들은 이제 낡은 담론이 되었다. 오랜 기간 문제가 되어 온 사회문제에 사람들은 기시감을 넘어 지겨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해결은커녕 제기되는 문제현상을 반증할 언어들을 찾고, 운동가의 주장에 내용과 관련 없는 새로운 구멍을 낸다. 그렇게 하면 지금 벌어진 문제들이 모두 거짓말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심연을 바라보면 그 심연도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를 바라보는 저 구멍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는 누군가(아주 높은 확률로 소수의 인간)가 의도적으로 만든 문제를 당연한(어쩔 수 없는, 혹은 원래 그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을 보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의 헐거운 의지는 생활 곳곳에서 쉽게 벗겨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착취한 만큼 값싸지는 제품, 사소하고 번거로워 끝내 귀찮아지는 다짐,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판단 내리는 안일함,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의 무의미한 언쟁, 무던하고 편안한 인상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 문득 찾아오는 허무함 등등. 관념과 일상은 시시각각 충돌하고 쉽게 모순된다. 누군가의 ‘업진살’처럼,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에 관한 신념은 나 자신을 걸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나를 걸 용기도, 세계를 위한 포부도 없다. 그냥 잘 살고 싶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다른 위인들에게 맡겨버린 지 오래다. 내가 사랑하는 생명들과 함께 잘 사는 것, 마땅한 각자에게 마땅한 몫을 마땅하게 내어주며 사는 것. 그게 부서져 가는 세상에서 범인들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결말 아닐까. 망해가는 세상에 태어났더라도 실패를 위해 살 순 없다. 나와 수많은 당신 사이에, 의미 찬 작은 세계라도 다시 만들어봐야지. 벌집처럼 견고하게, 동굴처럼 안락하지만, 출입문은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