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참 싫다. 짧고 가벼운 글을 매달 한 편씩 써온 지도 언 2년이 넘어간다. 어떻게 써야 할지,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를 때는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아예 쓰기 싫은 적은 처음이다. 왜냐하면 이사를 앞두고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세사기를 당했다. 글을 쓰려고, 글을 쓸 수 있는 기분이 되려고 노력했으나 모니터 앞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릴 기분이 전혀 아니다. 얌전히 집중해서 글 쓰는 상상만 해도 울화통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위장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집주인이 몰래 우리 집 우편함에 꽂아두고 간 편지를 처음 발견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실감나지 않았다. 편지에는 부동산 호황 때 벌여놓은 사업이 어려워져 연락이 되지 않을 것이고 죄송하다고 적혀있었다. 본인도 피해자라고, 나와 같은 입장이라고 적혀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어째서 집주인과 내가 같은 입장이라는 건지. 더 중요한 건 이 사태를 언제까지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말은 전혀 없었다. 그 뒤로 집주인은 보란 듯이 전화와 문자를 받지 않았다. 그 편지는 이제 연락을 받지 않을 거라는 선전포고였다.
오래지않아 나는 형사 고발과 민사 소송과 돈을 돌려받는 일, 이 세 가지는 모두 별개라는 것을 깨달았다. 형사 고발을 해서 가해자의 죄가 인정되어 처벌을 받아도, 민사 소송에서 이겨서 임대인에게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아도, 돈을 돌려받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돈이 없다면 돌려받지 못한다.
알고 싶지 않은 이 사실은 여러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체득되었다. 지난주 SBS 뉴스에 나온, 피해 가구가 100여 가구 이상으로 추측되는 대규모 부산 전세사기 보도에서 피해 임차인이 받은 편지와 내가 받은 편지가 같다는 사실, 같은 임대인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임차인들이 모인 전세사기피해 단톡방에서 밝혀진 피해 가구는 지금까지 150세대가 넘는다는 사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받는 데 몇 달씩 걸리는 승소판결문이나 수사개시서가 나오기 전까진 전세사기피해자로 국가에 인정받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과 100억이 넘는 피해금액을 임대인이 책임지기보다 파산으로 빚을 포기해버릴 확률이 더 높을 거라는 합리적인 짐작을 거쳐 내 체념은 점차 쇠똥구리의 똥처럼 악취를 풍기며 단단해지고 있었다.
편지를 받은 날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 새로운 고민에 직면했다. 그 고민에 따른 결정으로 한 발짝씩 어떠한 조치라도 취하고 있지만 앞은 여전히 깜깜하다. 한 3일 정도는 정말 혼란스러웠다. 입맛이 뚝 떨어져 국밥 한 그릇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로 나는 국밥을 남겨본 적이 없다!) 그래도 곧 일상으로 돌아왔다. 회사에 가서 수다도 떨고, 전세사기 피해자만이 할 수 있는 자조적인 농담도 하고, 맛있는 저녁도 푸짐하게 먹고, 취할 때까지 술도 마시고, 강아지랑 껄껄 웃고, 보고 싶었던 영화도 본다. 그런데 일상을 지내면서도 문득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