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뭘까. 술, 이 요망한 것의 정체란. 차갑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나도 뜨거운. 나는 술 때문에 피도 보고 눈물도 보고 절망을 맛보았고, 대체로 나른한 기분을 느끼거나, 좋은 사람을 얻기도 했더랬다.
술과 나의 관계는 뭐랄까. 좀 그렇다. 연애 비슷한 것과 닮았다. 우리 관계에서 모든 행동과 결정은 내가 한다. 우리 사이는 오로지 나의 의지에 따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한다. 느슨하게 때로는 촘촘하게 관계가 조직된다. 내가 그만 만나자고 하면 겸허히 내 결정을 받아들이는 얄미운 애. 정작 이별을 고하는 건 나지만, 그런 내가 서운할 정도로 별말 없이 모조리 받아들이고 사라지는 미치도록 미운 애 같다. 노력은 내 몫이지만, 권력은 모조리 네가 지닌. 흡사 을의 연애 같은 것. 아니 나도 자존심이 있지. 근데 끊어내기가 힘들어, 자꾸 생각나잖아.
서투른 연애를 떠올리면 20살 여름, 언젠가 광안리 바닷가에서 친구와 둘이 마셨던 소주가 생각난다. 어리고 싱싱한 간이 영원할 줄 알았던 시절, 친구와 편의점에 들러 소주를 한 병씩 샀다. 200원짜리 츄파춥스도 하나씩 골랐다. 그리고 백사장으로 걸어가 적당히 인적 드문 자리를 골라잡고 앉았다.
나와 친구는 각자 소주병 뚜껑을 열었다. 뚜두둑- 굳었던 마음이 뻐근하게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빨대를 꽂는다. 투명한 소주를 빨대로 쭉 넘기고 쓴 기운이 올라오기 전에 츄파춥스를 혀 위에 서둘러 갖다 댄다. 딸기우유맛 츄파춥스는 달달하다. 소주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진다. 술병에 소주가 비어갈수록 입안에서 굴리는 사탕 대가리도 조그맣게 작아진다. 얼굴에 발그레 열이 오르고 눈꺼풀은 살짝 내려앉는다. 몽롱해진 머리 주변으로 파도 소리가 가득하다. 친구는 소주 반병을 남기고 그새 모래 위에서 뻗었다.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남은 술을 찔끔찔끔 삼켰다. 잔잔한 모래 위에 우뚝 솟은 섬 하나처럼, 파도도 없는 백사장 위에서 흔들리는 동그란 내 등. 파도 소리 사이로 사람들이 수런수런 이야기를 나눈다. 규칙적인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사탕도 빨고 빨대도 빨고 번갈아 빨다가 술이 동나자 그제야 친구를 깨웠다. 우리 집에 가자.
그때는 나름 낭만적이기도 하고(도대체 뭐가), 웃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하나쯤 가진 술에 관한 무용담 같았는데. 술에서, 아니 20대에서 깨어나 30대가 되어보니 그저 비루한 풍경일 뿐이다. 부끄럽고 우습다. 뭐야, 성장한 건가. 어른이 된 건가. 그건 아닐 거야. 다사다난 술주정의 역사를 줄줄이 만들고도 아직도 나는 술을 끊지 못했다. 여전히 쉽게 기분에 취하고, 여전히 쉽게 오늘의 취기에 나를 맡긴다.
무방비 상태로 가볍고 달큰한 막대사탕 하나에 의지해 소주를 들이켰던 기억이 가끔 떠오른다. 당혹스러운 기분. 그때 너, 왜 그랬니. 달기만 하고 영양가는 하나도 없는, 그저 그렇게 끝났던 연애를 떠올릴 때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