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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슴 Oct 11. 2024

블랙 팀장의 노래

서른의 인생들

그는 팀장이다. 대표님을 제외하고, 우리 회사를 가장 오래 다닌 사람이다. 그는 보통 검정색, 가끔 짙은 회색 옷을 입고 출근한다. 그래서 그를 블랙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블랙은 이 회사를 다녔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도 블랙은 여전히 회사를 다녔다. 재입사 한 지금, 나는 블랙과 같이 회사를 다닌다. 언젠가 이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건 블랙이 아니라 나일 것이다.     


이 회사는 블랙의 첫 회사다. 대학교 졸업 후 입사한 첫 회사에서 블랙은 지금껏 다니고 있는 것이다. 블랙의 나이는 40대 초반. 회사의 네 귀퉁이 중에서 하나에는 출입문이 있고 또 다른 하나에는 대표님방이 있다. 다음 귀퉁이에는 종이 샘플이 그득하게 쌓여있고 마지막 귀퉁이에 블랙의 자리가 있다. 블랙은 항상 9시 20분쯤 느지막이 나타나 아래위로 검은 옷을 입고선 모서리에 앉아있다. 모서리벽 그림자 위에 블랙의 까만 옷이 포개진다. 왠지 모르게 블랙이 앉은 자리는 유난히 어둡다.     


블랙의 자리는 복잡하다. 블랙의 책상을 둘러싼 책꽂이에는 블랙이 다닌 세월만큼 오래된 책과 시각자료 들이 꽂혀있다. 그 위로는 쌓이고 쌓여 제법 단단해진 먼지가 덮여있다. 블랙이 앉은 의자 뒤로 언젠가 자신이 만들었던 편집물과 정체 모를 박스 패키지들이 불규칙하게 펼쳐져있다. 그리고 언제부터 모았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 빈 종이쇼핑백들이 마트료시카처럼 서로서로 겹쳐진 채로 방치돼있다. 역시나, 이 모든 것들 위에도 어김없이 먼지가 들러붙었다.     



블랙은 아주 독특한 습관이 있었다. 노래 부르기다. '노래 부르기'라는 단어는 꽤 무난한 취미 같지만, 문제는 '업무 시간' 동안 '사무실'에서 부른다는 것이다. 내가 첫 입사하기 전부터 블랙은 사무실에서 노래를 불러왔기 때문에, 정확히 블랙이 몇 년차일 때부터 노래를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보다 오래된 직원이 없기 때문이다.      


블랙은 주로 사무실에 틀어놓은 음악을 따라 부른다. 블랙의 노래는 작은 사무실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가사를 아는 노래라면 정확히 가사를 읊었고 잘 알지 못하는 노래라면 흥얼거렸지만 후렴 정도는 항상 따라 불렀다. 블랙은 보통 오후부터 노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몇 시간을 불렀다. 가끔은 오전부터 입을 뗄 때도 있었다. 블랙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우리(팀장급 미만 직원들)들은 그의 콘서트가 개최되었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이어폰이나 이어플러그를 찾았다.      


우리는 블랙의 노래를 멈추기 위해 노력했다. 흥이 오른 블랙은 목소리에 아랑곳없이 도중에 노래를 바꾼다든가, 그가 따라 부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장르로 바꿔 틀었다. 하지만 블랙은 놀라운 순발력으로 바뀐 노래를 낚아채 멜로디에 다시 자기 목소리를 실었다. 블랙은 아이돌 음악도, 가요도, 인디음악도, 힙합도, 심지어 팝송까지 모두 소화하는 올라운드였다. 중요한 원고를 쳐내야 하는 날이면, 사무실 다른 직원에게 가사가 없는 재즈 음악을 틀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잔잔한 반주를 매일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가사가 있는 노래로 사무실에서 기분을 낼 때마다 우리는 블랙 콘서트의 관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앞선 누군가가 퇴사하면서 블랙의 노래가 스트레스였다고 털어놓았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블랙이 노래를 멈추지 않는 현실은 그 소문이 더욱 전설처럼 느껴지도록 만든다. 나는 블랙이 사무실에서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행위가 '권력'이라고 생각했다. 사무실을 편하게 만드는 권력, 노래를 모두가 (어쩔 수 없이) 듣게 만드는 권력, 노래를 멈추지 않아도 되는 권력, 무심결에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괜찮은 권력.     


나는 재입사 후 블랙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블랙의 목소리가 여름밤 모기소리처럼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내가 맡은 일은 주로 원고를 쓰는 것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집중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블랙이 읊는 가사를 귀로 집어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가요들을 블랙은 모조리 꿰고 있었다. 블랙의 노래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알아갈수록, 내 윗가슴 언저리에 무언가 차곡차곡 쌓였다.     


고백하건대 나는 둘째라면 서러울 주정뱅이다. 회식 때마다 여러 번 거나하게 취했으나, 용케 아직 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 회사로 돌아온 후 맞이한 첫 회식, 나는 평소처럼 술을 넉넉히 걸쳤다. 블랙을 찾아갔다. 옆자리에 앉아 '블랙의 노래'에 관해 모조리 이야기했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듯이, 한 작은 고을의 사또를 찾아가 읍소하듯이.     


팀장님, 노래 부르시는 거 알고 계세요? 아뇨, 음... 네. (블랙은 본인이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긴 몇 시간이고 부르는데 그걸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긴 하다.) 노래를 왜 부르시는 거예요? 그는 대답이 없었다. 노래를 부르실 때마다 제가 쳐다봐 드릴까요? 아뇨, 카톡을 주세요.      



다행히도 블랙은 뒤끝이 없다. 이런 면에서 블랙은 점잖다. 정확하고 깔끔하다. 만취한 자의 하소연이라도 본인의 잘못이라고 판단하면 받아들인다. 잔뜩 취한 자의 심문이라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대답해준다. 그런 면에서 블랙은 고마운 사람이다. 그날 회식 이후로 블랙의 노래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어졌고, 이제 블랙은 콘서트를 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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