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한 자락에 놓인 우리의 마음
베른에서 기차로 약 30분. 도시의 끝자락을 벗어나 드넓은 평원을 달리다 보면 조금씩 길고 웅장한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스위스 하면 제일 먼저 딱 떠오르는 융프라우 지역을 여행하기 위한 출발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툰. 편리한 교통편과 더불어 알프스 산과 호수를 배경으로 하는 스위스의 전형적인 풍경을 간직하고 있어 자연친화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스위스인들의 사랑 또한 한 몸에 받고 있다. 근래 들어서는 툰 시가지나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호숫가에서도 커다란 여행가방을 짊어지고 끌고 다니는 관광객들이 흔하게 보이는데, 몇 년 전에 비해 확실히 툰의 글로벌 인지도가 높아진 것 같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괜히 더 반갑기도 하고.
툰은 우리에게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유소년기 20년을 전부 툰에서 보낸 내 남편은 이 지역 반경 10km 내로 모르는 곳이 없다. 툰 도심으로부터 15분가량 떨어진 작은 호숫가 마을엔 얀의 본가가 위치해 있고, 시가지 근방에는 얀 누나 부부네가, 마을의 뒷산을 따라 버스 타고 20분쯤 올라가면 펼쳐지는 구릉지대에는 얀 절친네 가족이 둥지를 틀어 놓았다. 스위스에서는 편하게 누군가를 만날 때 집에 사람을 불러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인데, 우리와 가까운 가족친구들은 사람들을 부르는 걸 특히나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어서, 덕분에 정말 시도 때도 없이 툰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는 것 같다. 고작 30분 떨어져 있는 곳 이긴 하지만 베른과는 또 다른 분위기와 느낌을 지니고 있어 갈 때마다 감각적으로도 리프레쉬가 된다.
얀과 장거리 연애를 하던 시절, 내게 잠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때 얀 부모님이 감사히도 빈 방을 내어 주셔서 석 달 남짓 얀의 본가에서 머문 적이 있다. 툰에서 인터라켄으로 향하는 길 초입 어디 즈음 위치한 휘니바(Hünibach) 마을, 그 언덕 어딘가에 자리 잡은 부모님 댁. 본가는 얀을 보러 처음 스위스에 왔을 때 딱 이틀 정도 방문했었는데, 그때가 한 겨울이었다면 이번에는 한 여름에 온 것이라 느낌이 퍽 달랐다. 카펫과 보온재를 걷어내 훨씬 더 시원한 집. 이름 모를 꽃들과 벌, 나비, 달팽이, 도롱뇽들이 작은 생태계를 꾸리고 있던 마당 앞 비탈진 정원. 거의 매일 저녁식사에 가벼운 와인과 아이스크림을 곁들이며 더위를 식히는 가족들까지. 겨울이 좀 더 포근하고 전통적인 문화를 표방하는 느낌이라면 여름은 훨씬 더 가볍고 생기 넘치는 느낌. 첫인상은 겨울이 더 강렬했으나,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만족은 여름이 더 큰 것 같다는 생각도 이때부터 했던 것 같다. 얀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막내동생과 부대끼고 살면서 그들의 일부가 되어가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었던 그 여름날들이 기억 속에서 더 미화된 부분도 있겠지만.
툰 호수의 한 자락에는 휘니바 마을 사람들이 여름이면 피크닉과 수영을 즐기는 허니비치(Honeybeach)가 있다. 허니비치는 휘니바의 이니셜인 HB를 따서 붙인 수변구역의 별칭이다. 바다가 없는 스위스에서 호수는 그들만의 바다가 되곤 하는데, 독일어로도 호수를 See[제]라고 하기 때문에 여기 사람들은 크게 구분 짓지 않고 사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가 되면 허니비치는 돌담을 타고 첨벙첨벙 호수로 뛰어드는 꼬마들의 무리와 파라솔 아래에 썬베드를 펴놓고 느긋하게 책을 읽는 어른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조금만 더 일찍 올 걸! 좋은 자리는 다 찼지만, 왼쪽 모서리 끝에 반쯤 걸친 나무그늘을 향해 우리도 발걸음을 옮겨본다. 가져온 비치타월을 잔디에 깔고 옷가지와 소지품을 쑤셔 넣은 에코백을 신발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면 준비 끝. 뜨거워진 몸을 조금이라도 빨리 식히러 일단 호수로 달려들어간다.
아, 물이 매우 차다. 이거 다 빙하수였지.
1분 정도 얼얼해진 몸을 녹이려 바쁘게 몸을 움직이다 보면 천천히 온도에 익숙해지면서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늘, 구름, 산, 호수, 나무, 집. 눈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몽글해진다. 레인 밖으로 조금 더 헤엄쳐나가 보면 저 멀리 융프라우 삼대장도 보인다. 카약을 타는 청년들과 호숫가 테라스에서 여유를 즐기는 노부부가 눈인사를 건넨다. 청둥오리 가족이 물가에서 몸을 말리고 있다. 시어머니 수지와 배영 자세로 햇살을 맞으며 다시 허니비치로 돌아간다. 새삼 수지의 평온한 미소가 허니비치의 여름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한국에 동양의 세계관이 녹아있는 궁궐이 있다면, 스위스에는 중세시대 귀족의 권위를 상징하던 성(castle)이 있다. 봉건제가 성행하던 중세 유럽에서 영주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를 관리하고 방어하기 위해 성을 건설했는데, 알프스의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인해 지역 영주들의 독자적인 통치와 방어 체계가 특히 잘 발달했던 스위스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각 마을에 위치한 다양한 모습의 성들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툰에는 크게 국가 주요 문화재이자 도시를 대표하는 툰 성(Schloss Thun)과 툰 호수 남쪽에 그림처럼 놓여있는 디즈니 풍의 샤다우 성(Schloss Schadau)이 있다.
두꺼운 흰색 외벽에 뾰족뾰족한 벽돌색 지붕, 날카로운 각이 느껴지는 툰 성은 귀족의 권위를 드러내고 외부의 침입을 방어한다는 중세 요새 건축의 공식을 따른다. 시가지 중심에 우뚝 솟아 온 마을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툰 성으로 오래된 돌계단을 밟으며 언덕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툰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공간에 다다른다. 성벽 앞 벤치에 앉아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있다가, 몇 백 년 전 같은 자리에 서서 그 시대의 미래를 고민했을 영주의 얼굴을 떠올려보게 된다. 막강한 권력을 쥐었던 만큼 고민도, 드라마도 많지 않았을까. 그런 삶은 사양한다고, 이런 곳은 와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니, 그저 분수에 맞게 평범히만 살면 좋겠다고 속으로 바란다.
시가지로부터 떨어져 공원과 호수에 둘러싸인 샤다우 성은 귀족적인 품위, 경관과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19세기경 프랑스계 자본가가 영주의 땅 위에 지어 올린 비교적 현대적인 건축물인 만큼 더욱 또렷한 색감과 기교가 돋보이며, 성 주변으로 뻗어 나가는 자연의 여백은 이 공간을 더욱 감각적인 곳으로 만들어 준다. 실제로 샤다우 성과 공원 일대는 툰 사람들의 단골 결혼사진 촬영장소로 꼽힐 정도로 현지인들의 인기를 톡톡히 누리고 있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시아버지 다니엘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온 가족이 모여 샤다우 성에서 브런치를 먹었는데, 성 내부 역시 밖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고풍스럽고 우아했다. 늘 먹는 치즈도 여기서 먹으니 괜히 더 맛있었던 것 같은 기억이.
툰을 자유로이 거니는 얀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됨을 만들어가는 여러 요인들 중 장소의 힘에 대해 곱씹어본다. 산과 호수를 순환하며 정화된 상쾌한 공기, 좁아지는 수로를 따라 힘차게 흐르는 옥빛 물줄기, 고고한 자태로 그 사이를 유영하는 백조, 오랜 세월의 흔적을 품으며 아름답게 보존된 아담한 시가지, 도심과 자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동화 같은 성채. 알프스의 태곳적 순수함이 존재하는 이 공간에서 참 맑고 순수하고 예쁘고 생동감 넘치는, 그런 존재가 만들어지는구나 하고. 이런 곳이라면 언젠가 태어날 우리의 아이에게도 선물 같은 세상을 안겨줄 수 있으리라. 찰나의 순간, 그의 눈망울 속 너울거리는 찬란한 빛을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