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찐이라니까!
내가 처음으로 오른 알프스 산은 그 유명한 융프라우를 마주한 융프라우요흐도, 마테호른을 마주한 고르너그라트도 아닌 당시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던 니더호른이다. 인터라켄을 기점으로 툰 쪽에 약간 더 치우쳐져 있는 이 산은, '낮은(nieder) 뿔(horn)'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긴 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 인터라켄, 툰-브리엔츠 호수 등 스위스 대표 관광지들을 아우르는 베르너 오버란트(Berner Oberland)의 핵심 지역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명소이다. 유럽의 지붕이라는 상징성과 새하얀 설산의 신비로움에 매혹돼 매년 7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융프라우요흐는 스위스 현지인들에겐 비싼 기차표와 늘 북적대는 인파로 크게 매력적인 곳은 아니란다 (얀 동네 친구 다섯 명 중 한 명도 융프라우요흐에 가본 적이 없는 걸로만 봐도 설명이 됐다). 대신 베르너 오버란트 쪽에 사는 사람들은 고지대에서 알프스를 감상하는 자신들만의 스팟 같은 곳들이 있는데, 툰과 가까운 곳에 사는 얀의 가족들에게는 니더호른이 그러한 곳으로 꼽힌다.
니더호른 전망대에 도착해 커진 동공으로 내내 '미쳤다'를 연발하는 나를 보며 덩달아 흥분하는 얀. "여기가 찐이라니까!" 웅장한 곡선을 그리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산맥, 길게 늘여진 옥빛 툰 호수, 그 옆으로 옹기종기 놓인 마을 일대, 니더호른 뒤편으로 깎아지르듯 떨어지는 절벽과 협곡. 처음부터 아예 기대라는 것을 안 하고 올라서 그랬는지 눈앞에 펼쳐진 말도 안 되는 풍경에 더 압도됐던 것 같다. 훗날 얀과 함께 융프라우요흐에 올랐을 때도 니더호른에 처음 올랐을 때 느꼈던 수준의 감동과 짜릿함에는 미치지 못했던 듯싶다.
스위스 알프스에 올라보면 경관도 경관이지만 등산로 옆으로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거나 풀을 뜯어먹고 있는 동물들이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대개 농부들이 방목해 놓은 소나 염소, 양 떼가 청아한 종소리를 울리며 평화롭고 목가적인 알프스의 풍경을 완성하는데, 내 생각엔 이게 관광객들에게는 정말 큰 셀링포인트다. 내가 자연 속에 있다는 몰입감을 극대화시켜 주는 장치랄까. 다른 나라에 있는 산들을 많이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스위스 알프스에 올라보면 확실히 굉장히 많고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을 보게 된다.
참고로 나의 최애 알프스 동물은 마멋(Marmot)이다. 털이 복슬복슬하게 쪄있는 생김새와 등산객이 주는 간식을 끝도 없이 야금야금 먹어대는 식성이 너무 귀엽고 어이없고 웃기다.
드넓은 평야와 목초지보다는 가파른 절벽과 협곡지대가 많은 니더호른에서는 Steinbock[슈타인보크]라고 부르는 알프스 산양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스위스 알프스 생태계의 대표적인 동물들 중 하나로 자주 꼽히며 수컷의 기세등등한 곡선형 뿔과 수직에 가까운 암벽을 자유자재로 등반하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무분별한 사냥으로 한 때 멸종위기 근처까지 갔던 슈타인보크지만, 스위스 정부의 보호 노력으로 오늘날은 국립공원이나 자연보호구역 등을 포함해 스위스 어디를 가던 한 번쯤은 이들을 만나 볼 수 있을 만큼 개체 수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절벽 위 초원에 굳건히 앉아 건너편 니젠(Niesen) 봉우리를 응시하는 산양들에게서 강인함이 느껴진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엄마 산양을 따라 종종 발걸음을 옮기며 풀을 뜯어먹는 아기 산양 다섯 마리가 하염없이 순수하고 예뻐 보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곳은 그들의 구역이자 삶의 터전이다. 자연 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작년 가을즈음 친언니가 2주 정도 스위스를 방문했다. 나도 나지만, 한국에서 전통혼례를 했을 때 언니가 얀 부모님을 옆에서 세심하게 잘 챙겨드렸어서, 언니가 온다는 소식에 얀 부모님이 누구보다도 기뻐하셨다. 베른에 며칠 머물다가 툰 쪽으로 넘어오자마자 시어머니 수지가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며 우리 자매를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니더호른.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오랜만에 와보니 또 감회가 새로웠다. 언니 역시 니더호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올라갔다가 자기를 둘러싼 엄청난 경관에 턱이 빠진 채 셔터만 눌러댔다. 우리를 보고 흐뭇하게 웃는 수지.
등산 애호가인 수지를 따라 열심히 등산로를 걷다가 수지가 오랜 시간 몸 담은 툰 지역 산악 동호회 사람들을 만나 빵과 커피도 얻어먹고, 암벽 위를 제멋대로 넘나드는 슈타인보크들도 실컷 보고, 협곡 위를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에 잔뜩 쫄기도 했다가, 건너편 산에서 신나게 패러글라이딩 하는 사람들도 구경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산을 탔다. 중간에 내리던 비 때문에 하산하는 동안 신발과 바지 밑단이 온통 진흙으로 덮이긴 했지만은 그마저도 자연과 한 몸이 되어간다며 좋아라 했다. 등산 전날 학원에서 배운 'matschig (질퍽한)'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시의적절하게 쓰일 줄이야. 내려가는 길 내내 언니랑 matschig matschig 노래를 부르며 복습도 야무지게 했다.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더 깊게 다가왔던 감동. 니더호른은 내게 그런 산이었다. 론리플래닛 책자 한 귀퉁이에나 실려있을 법한 낯선 이름을 가진 곳, '얀네 가족들이 좋다 하니까 한번 가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올랐던 그곳에서 나는 스위스 알프스가 가진 진짜 매력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우리는 늘 ‘대단한 무언가’를 찾아 나서지만, 가끔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더 오래 기억될 아름다움을 만나는 순간들이 있다. 그걸 알아채기 위해 필요한 건, 거창한 계획도 아니고 완벽한 준비도 아닌, 그냥 한 번 해보는 마음 하나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