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엄한 호수, 외슈넨제(Öschinensee)

스위스에 무릉도원이 있다면

by FrauChoi

스위스로 여행 올 계획을 짜는 친구들이 내게 늘 물어본다.

"너가 가본 곳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어?"


쉽지 않은 질문이다. 6년간 여러 지역을 오며 가며 많은 곳을 둘러봤지만, 어디 한 군데 딱 집어 말하기 힘들 정도로 각각의 장소가 서로 다른 분위기와 매력을 뿜어낸다. 특히나 독일권, 프랑스권, 이탈리아권으로 나뉘어 지역별 특색이 더더욱 또렷한 스위스에서는 개인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 좋아하는 곳이 꽤 많이 달라지기도 한다. 베른을 기점으로 독일권 스위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나로서는 아무래도 베르너 오버란트(Berner Oberland) 지역에 정이 많이 가는데, 그린델발트에서 남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칸더슈테그(Kandersteg) 마을 깊은 산속 어딘가에는 내가 너무나도 애정해서 매년 여름이면 어김없이 누군가와 찾아가는 외슈넨제가 숨어 있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 물 색깔이 유난히 예쁜 외슈넨제




외슈넨제를 가장 처음 나에게 소개해 준 건 얀의 누나인 라라. 엄마 수지를 닮아 한없이 친절하고 에너지 넘치는 그녀를 아직 잘 몰랐을 때, 라라의 제안으로 둘이서 4시간 반 짜리 등산을 하러 칸더슈테그로 향했다. 툰 기차역에서 만나 칸더슈테그에서 내려 외슈넨제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탈 때까지 알아서 표도 척척 끊어주고, 시간표도 봐주고, 물과 간식도 사 와주던 라라가 어찌나 고맙고 든든하던지. 3남 1녀 중 장녀라서 그런가, 얀 포함 어딘가 느슨한(?) 구석이 있는 남동생들과는 달리 빠릿빠릿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는 언니가 너무도 믿음직스러웠다. 얀이 자기 어릴 때는 누나가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을 때도 있었다고 했는데, 동생들 기강 잡는 당찬 꼬마대장 라라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또 20분 정도를 자갈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니 먼발치서 외슈넨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와! 뭐지 저 물 색깔은? 원거리에서 보느라 뭔가를 잘못 보고 있나 눈을 비비며 호수 앞으로 다가가봐도 그 오묘한 색상은 더 뚜렷해지기만 했다. 터키옥색이라 불리는 turquoise 빛깔, 거기에 흰색 물감을 섞어 놓은 듯 크리미한 질감도 느껴지는, 정말 독특하고 매혹적인 색. 그런 환상적인 빛깔의 외슈넨 호수 주변으로 하늘을 찌르듯 솟아오른 침엽수들과 가파른 암벽 위로 우뚝 서있는 알프스의 봉우리들까지 더해져 어딘가 초월적이고 신성한 느낌마저 드는 이곳. 서양에 무릉도원이 있다면 이러한 모습일까. 눈 돌리는 모든 곳이 절경인 스위스의 자연이지만, 외슈넨제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단순한 아름다움 이상의,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어떠한 이상향의 모습에 가까웠다. 마음 깊숙한 곳에 무언가 울려 퍼졌다. 그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이 가득 차올랐다.


외슈넨제를 더 다양한 각도에서 감상하기 위해 등산길에 올랐다. 길이 조금 험할 수 있다고 라라가 경고했었는데, 조금 험한 정도가 아니고 그냥 여기서 자칫하면 미끄러져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슬아슬한 보폭의 길이 이어졌다. 알프스 산을 몇 차례 타보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면, 등산객 스스로가 위험에 대한 준비성과 책임감을 확실히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등산객의 안전과 편의성이 최우선으로 고려된 우리나라의 산행로와는 달리 스위스의 산행로는 자연 그대로를 최대한 존중하는 형태로 설계되어 있다. 때문에 난간, 계단 같은 인공적인 구조물은 정말 위험한 구간에만 최소한으로 설치되어 있고, 대부분 야생 상태의 자갈길, 흙길, 바위길이 안전장치 없이 쭉 이어진다. 어떨 때는 이 등산로마저 명확히 보이지 않아 앞사람과 등산스틱에 의존해 길을 찾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나 또한 처음에는 이런 상황을 겪고 무척 당황했지만, 한편으론 나와 자연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내가 자연에 온전히 동화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경험하며 강렬한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외슈넨제의 산행로에서 역시, 좁게 난 길 옆으로 나를 집어삼킬듯한 거대한 자연으로부터 엄청난 에너지를 느끼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암벽 밑 그늘에서, 작은 폭포수 근처에서, 나무 아래 벤치에서 쉬어가며 세 시간쯤 산행을 하다 보면 어디선가 동시다발적으로 맑은 종소리가 들리며 푸른 호수를 배경으로 한 언덕 위 목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소 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듬성듬성 있는 바위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일광욕을 즐기는 소들도 보인다. 앞쪽을 보니 등산객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몇 마리의 소들이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인간들을 구경하고 있다. 울타리 같은 건 없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우리가 소들의 영역에 진입한 것이다.


아무리 소가 초식동물이라 온순하고 인간이 오랜 시간 길들여온 가축이라 할지라도, 꽤나 크고 날카로운 뿔, 그렁그렁한 눈망울, 묵직한 체구로 내 앞길을 막고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암소 한 마리를 보고 있으면 어깨가 저절로 쪼그라든다. 우리 바로 옆에는 다른 암소가 푸짐한 엉덩이를 깔고 앉아 세차게 꼬리를 흔들며 파리를 쫓고 있었다. 그런 소들을 마냥 귀여워하며 등허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성큼성큼 길목을 지나가는 라라 언니. 알프스 레이디의 짬바란!

그녀의 말처럼 소들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계속 있었고, 나도 기세를 부려 옆에 가까이 다가가 빠르게 사진 몇 장을 찍은 다음 유유히 그 길목을 빠져나왔다. 어딘가 묘하고 신기한 소한테 관찰당하는 경험. 이후 다른 산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몇 번 더 겪다 보니, 이제는 소가 내 옆으로 와도 그런가 보다 하고 자연스레 셀카도 찍고 한다.


소들의 영역에 발을 들인 등산객




소들의 땅 뒤편에 위치한 오두막에서 시원한 아이스티 음료로 기력을 충전하고 가져온 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며 점심시간을 즐겼다. 외슈넨제도 식후경이라고, 힘든 산행으로 바닥난 에너지를 허겁지겁 채워 넣고 나니 다시금 우리 앞에 펼쳐진 장대한 뷰가 눈에 들어왔다. 제법 많이 올라왔구나. 위에서 내려다본 호수는 강렬한 햇살을 머금으며 더욱 쨍한 색조를 내뿜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과 개울물 소리, 카우벨의 하모니를 벗 삼아 오두막 밑으로 난 자갈길을 타고 산을 내려왔다. 내려가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두 번 인가 시원하게 엉덩방아를 찧긴 했다만 하산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을 만큼 빨리 끝났다.


오후 두세시쯤 다시 호수 초입부로 돌아오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등산으로 땀범벅이 된 나도 시원한 물속에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여분의 옷과 수건이 없는 상태에서 무리수를 두고 싶지는 않아 그냥 고양이 세수 몇 번에 발만 담그는 걸로 만족했다. 물이 워낙 차가워서 그것만 해도 더위는 싹 가신다. 냉수족욕을 하고 나무그늘에 앉아 라라와 사이좋게 종아리 근육을 풀며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물장구소리와 웃음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가 어우러져 호수의 오후를 밝힌다. 더 바랄게 뭐가 있으랴. 수면 위로 윤슬이 길게 어른거리고 밀려오는 노곤함에 넋이 나가려 할 때 즈음 라라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 잠은 이따 기차 타면 쓰러져서 자면 되니까. 반짝이는 외슈넨제를 뒤로한 채, 살랑이는 바람의 배웅을 받으며 무겁지만 기분 좋은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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