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만개한 꽃과 음악의 도시
츠바이짐멘에서 출발하는 골든패스 익스프레스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두 시간 즈음 내달리면,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지는 철길을 따라 비탈진 언덕에 들쑥날쑥 자리를 잡은 마을과 푸르게 늘어지는 레만 호수의 전경이 탁 트인 창 너머로 눈앞에 밀려들어온다. 저 멀리 보이는 계단식 포도밭과 맞은편 자리에서 불어로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남녀. 왠지 모르게 들숨에 진한 프렌치 향이 짙게 베인 듯하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몽환적인 Laufey의 목소리와 함께 뜬구름처럼 산뜻한 마음으로 도착한 이번 역은 몽트뢰.
스위스에서 가장 큰 호수라는 명성에 걸맞게, 몽트뢰 시가지에 서서 레만호를 바라보면 드넓은 수면 위로 차분한 물결이 끝도 없이 넘실대는 것이 마치 잔잔한 바다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건너편에 보이는 크고 작은 산맥의 모양새도 거대한 호수가 메워 넣은 간격 때문에 덜 날카로워 보이는 듯하고. 일자로 쭉 뻗은 산책로 옆에 심긴 각양각색의 들꽃은 자칫 단조로워 보이는 풍경에 향기와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도시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차분하고 수려한 분위기 때문인지, 스위스의 여러 호반 도시들 중에서도 몽트뢰는 어딘가 더 여성스럽고 우아하다.
이러한 매력으로 하여금 몽트뢰는 전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을 1967년부터 개최해오고 있다. 매년 7월 초부터 약 2주간 총 300개가 넘는 공연이 유료, 무료구역으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으며 근 60년간 Miles Davis, Ella Fitzgerald 같은 재즈 거장들부터 Raye, Celeste 같은 현세대의 굵직한 재즈 보컬들을 아우르며 축제의 네임벨류를 증명하고 있다. 재즈뿐만 아니라 팝, 락, 힙합, 알앤비 등 비(非) 재즈 아티스트들도 대거 이름을 올려 점점 더 많은 음악팬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요즘 들어서는 메인 스테이지의 라인업 또한 재즈보다는 다른 장르로 치우쳐져 가고 있다는 비판을 많이 받기도 한다. 실제로 작년 여름 페스티벌에 하루 가봤을 때도 기대와는 달리 재즈보다는 팝 장르의 공연이 더 주축이 된 듯한 분위기에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상업적 성공의 달콤한 맛도 있겠다만 '재즈' 페스티벌이라는 기대에 좀 더 부합하는 방향으로 축제가 기획되었으면 좋겠다. 살랑한 미디엄 템포의 재즈가 참 잘 어울리는 곳인데, 아쉬워 아쉬워.
몽트뢰는 또한 산타클로스가 밤하늘을 가르며 지나가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곳으로 아주 유명하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스위스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데, 몽트뢰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몽트뢰 특유의 부드럽고 섬세한 분위기와 동심을 자극하는 마법 같은 연출로 매년 40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은은하게 퍼지는 불향과 레만 호수를 따라 반짝이는 불빛,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크리스마스의 공기를 만끽하는 사람들을 보며 덩달아 설레는 내 마음. 친구들과 함께 마켓 이곳저곳을 돌며 각종 수공예품, 크리스마스 쿠키와 캔디, 몽트뢰 굿즈도 구경하고, 커다란 산타할아버지 인형 앞에서 사진도 찍고, 핫초코를 손에 쥔 채 호숫가 옆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는 저물고 호숫가 앞으로 사람들이 진을 치고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곧 플라잉 산타가 등장할 모양이다.
외마디 카운트다운 후 징글벨 캐럴 소리와 함께 멀리서 여유롭게 날아오는 루돌프 두 마리와 산타클로스를 태운 썰매. 실제 사람이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고 썰매에 올라타 하늘을 날며 손을 흔드니 아이들은 흥분의 환호성을 지른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징글벨 캐럴과 어우러져 호수 위 하늘을 가로지르는 플라잉 산타를 눈앞에서 직접 보니 어렸을 때 봤던 동화 속 장면이 현실이 된 것만 같아 황홀하고 설레었다. 산타가 진짜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 만큼 순수하고 마법 같은 순간. 그 순간만큼은 어른이고 아이고 모두들 눈을 반짝이며 크리스마스에 젖어들고었다.
꽃과 음악이 만개한 축제의 장, 몽트뢰를 누구보다 아낀 예술가가 있었으니, 바로 전설적인 락 밴드 퀸(Queen)의 프런트맨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이다.
1978년, 새로운 레코딩 스튜디오를 찾아 몽트뢰를 방문한 퀸은, 이미 재즈 페스티벌로 음악적 명성과 예술적 영감이 풍부했던 이 도시에 깊은 감명을 받아 레만호 자락에 위치한 스튜디오를 구입해 앨범 작업을 이어갔다.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수백만 청중 앞에서 엄청난 스케일의 공연을 펼쳤던 퀸과 프레디 머큐리. 허나 화려한 락스타의 삶 이면에는 에이즈, 우울증, 약물중독으로 고통받던 한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몽트뢰에서 프레디는 조용한 호숫가를 산책하며 평화와 아름다움을 찾았고, 병으로 쇠약해져 가면서도 끝까지 작곡에 몰두하며 자신의 고뇌와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5년이 지난 1996년, 그의 동상이 몽트뢰에 세워지면서 그의 삶과 예술을 기리는 많은 이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그를 추모하고 그의 음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드넓은 호수 위로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 온 거리를 기분 좋게 장식하고 있는 예쁜 꽃들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보헤미안 랩소디의 선율. 이쯤 되니 자연스레 엄마 생각이 난다.
퀸의 노래를 참 좋아하는 우리 김여사님.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보헤이만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보고 난 뒤로 한동안은 차만 타면 엄마는 노래에 맞춰 혼을 가득 담아 'Mama~~~'를 열창하곤 했다. 영화에 나온 퀸의 다른 노래들 역시, 어영부영 가사를 얼버무리긴 해도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곧잘 따라 불렀다. 옆에서 돌부처처럼 입 한 번 뻥긋 안 하고 운전하는 아빠와 멀미 때문에 맥없이 자빠져있는 언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껏 흥이 오른 채 마음껏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대는 엄마의 모습이 그저 자유로워 보여 웃음이 났다.
풍부한 감성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표현해 낼 줄 아는 사람.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한 이곳 몽트뢰를, 손에 손잡고 엄마와 나란히 걷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평온한 호숫가를 따라 꽃내음 가득한 산책로를 걸으며 행복을 찾은 프레디 머큐리의 발걸음을 따라서. 아쉬운 마음으로나마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눈앞의 그림 같은 풍경과 여유로운 분위기를 전한다. 화면 너머로 환히 웃다가 "이젠 나이 들어서 장거리 여행은 힘들어" 하고 한숨 푹 쉬는 엄마에게, 그래도 다음에는 꼭 같이 오자고, 와서 라보(Lavoux) 와인도 한 잔 하고 유람선도 타고 잔디밭에 앉아 퀸 노래도 듣자고, 서둘러 말해본다. 엄마랑 하고 싶은 것들을 줄줄이 늘어놓고 나니 마음속 그리움도 조금은 덜어지는 듯하다. 그렇게, 언젠가 엄마와 다시 찾을 몽트뢰의 모습을 그려본다. 오늘의 향기와 따스함이, 그날에도 우리 곁에 머물러주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