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호른이 보이던 보이지 않던
둘 다 지갑이 얇았던 대학생 시절, 스위스에 처음 온 나를 제대로 감동시키기 위해 체르마트에서의 근사한 주말을 준비했던 얀. 토블론 초콜릿 포장지에 그려진 마테호른(Matterhorn)이 있는 곳이라는 것 외에 아는 게 없었던 내게 그 주말여행은 가히 충격적일 만큼 좋았다. 얀이 큰맘 먹고 예약한 럭셔리 호텔에선 웰컴 드링크라며 바텐더가 눈앞에서 말아주는 칵테일을 원하는 만큼 마실 수 있었고, 널찍한 방 안에는 프라이빗 사우나가 있어 한증막을 즐기며 눈 내리는 알프스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잔뜩 낀 구름 때문에 아쉽게도 마테호른을 선명하게 보진 못했지만, 얼핏 얼핏 보이는 산봉우리의 거대한 윤곽만으로도 신비스럽고 장엄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천년 묵은 수호신이 마을을 지키고 서있는 듯한 느낌.
이런 아름다운 마을에서,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다니. 신혼여행에서나 느낄 법한 행복을 미리 맛본 느낌이랄까. 나에게 스위스를 ‘좋아하게 만들기 위한’ 가장 첫 페이지를 정성스럽게 준비해 주고 함께 써 내려가준 얀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훗날 얀과 추억을 곱씹으면서, 여행에 별로 관심도 없는 그가 이 여행을 계획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사전조사를 하고 다녔는지, 그 호텔에서 1박을 하기 위해 몇 달간 허리띠를 졸라맸는지 들었을 때, 들뜬 마음으로 그 모든 걸 준비했을 그의 마음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픽 웃음이 났다. "이제는 결혼했다고 더 이상 그런 곳에 안 데려가는 거야?" 하고 장난 섞어 얀에게 쏘아붙이니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으며 방으로 도망간다.
잔잔하게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작은 마을. 등산객과 스키어들이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쉬어가는 샬레 스타일의 카페. 마을에 은은히 울려 퍼지는 교회 종탑소리. 번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꿈결 같은 한겨울 산간 마을에서 느끼는 조금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마차나 소형 전기차를 제외하곤 일반 차량이 통행하지 않아 더욱 한적하고 깨끗한 시가지의 분위기가 내 몸과 마음을 맑게 한다.
외식 물가가 살인적인 스위스라지만, 그래도 모처럼 여행을 왔으니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어보자 하여 시가지에 위치한 로컬 레스토랑을 찾았다. 내가 주문한 메뉴는 알프스 지역 농부들의 음식에서 유래된 알펜 마카로니(Älplermagronen). 스위스식 맥앤치즈라고 생각하면 쉬운데, 에멘탈(Emmental) 치즈나 그뤼에르(Gruyère) 치즈 같은 진한 스위스산 치즈를 마구 올려주고 사과퓨레를 곁들여 단짠조합으로 먹는 것이 특징이다. 마카로니와 감자가 함께 들어가 있어 굉장히 든든하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따뜻한 치즈 폭포가 몸을 데워주어, 다 먹고 나면 포만감과 따스함에 내 몸도 치즈처럼 주욱 늘어나기 일쑤다. 레드 와인 한 잔을 곁들였더니 그냥 온몸이 녹아내린다.
이것이 스위스의 겨울이구나. 둘 다 눈이 반쯤 풀린 채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남은 와인을 홀짝홀짝 들이마신다.
몇 년 뒤, 시어머니 수지와 함께 체르마트를 다시 찾았다. 첫 번째 체르마트 여행에서 마테호른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다음 기회를 벼르던 나를 수지가 다시 데리고 온 것. 제법 청청한 날씨였지만, 마테호른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구름뭉치 뒤에 숨었다가 나왔다가 하며 우리랑 숨바꼭질을 해댔다. 지난번엔 거의 안보이다시피 해서 그냥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보일락 말락 하니 아주 애가 탈 노릇이었다. 체르마트 마을에서 가볍게 점심을 먹은 후, 마테호른과 주변지대를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산악열차를 타고 전망대가 있는 고르너그라트로 향했다.
열차는 천천히 고도를 높이며 마을을 벗어나 능선 사이를 유유히 가로질렀다. 120년 넘게 수많은 관광객과 산악인들을 실어 나른 고르너그라트 산악열차. 선로 중간에 톱니모양의 궤도를 놓아 열차의 톱니바퀴와 맞물려 이동시키는 차상궤도 시스템을 이용하여 험준하고 가파른 경사 위를 안전하게 지나다니고 있다. 개통 초기부터 전기로 운행되며 알프스의 자연환경 보호에 기여하고 획기적인 교통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스위스 철도산업의 기술력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한편으론, 알프스라는 천혜의 자연을 적극 활용해 관광산업을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국가의 부를 키워오던 스위스의 역사를 떠올려보며, 그런 눈부신 결과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력과 집념이 쌓였을까, 그 과정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여기서 내려서 남은 길은 걸어올라 가자. 중간에 마테호른을 가장 예쁘게 볼 수 있는 호수를 지나게 될 거야."
열차가 중간지점인 리펠베르그(Riffelberg) 역에 도착했을 때, 알프스 마스터인 수지의 가이드를 따라 하차한 후 트래킹을 시작했다. 푸른 하늘 아래 마테호른 산봉우리가 꽤 가까이 있는 듯 눈앞에 펼쳐지는데, 야속하게도 구름이 정확히 삼각뿔 부분을 가려 멋진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미스터 토블론. 완벽한 뷰에 대한 욕심은 잠시 내려두고 수지랑 조잘조잘 수다를 떨며 흙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거울처럼 마테호른과 주변 산맥을 비추고 있는 리펠 호수(Riffelsee)에 도착했다. 수지가 말한 뷰스팟이 여긴가보다.
호숫가 근처의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 목을 축이며 조용히 풍경을 바라봤다. 구름 장막에 숨어 여전히 흐릿하긴 해도, 바람 한 점 없는 수면 위에 반사된 마테호른의 실루엣이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어떻게 암벽이 저렇게 깎아지르듯 삼각형으로 딱 떨어질 수 있지?' 외계 행성에 와 있는 듯, 알 수 없는 자연의 신비에 감탄하며 이 비현실적인 광경을 마음에 담았다. 나와 같은 생각인지, 엄마와 함께 우리 뒤를 따라오던 꼬마 소년도 "Mega Cool!"을 외치며 리펠제 근처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고요한 명상에 잠긴 사람, 스케치로 풍경을 남기는 사람,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웃음꽃을 피우는 사람들. 각자의 방식으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는 이들에게서 무언의 여유를 느낀다.
해발 3,000 미터의 고도 위에서 조금은 더뎌진 발걸음과 가뿐 숨을 몰아쉬며, 한결 가까워진 고르너그라트 전망대를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무거워지는 다리와는 반대로 가벼워지는 마음. 경사로가 끝날 때까지 하염없이 걷다 보니, 마침내 정상을 알리는 표지와 함께 마테호른과 병풍처럼 주변을 둘러싼 다른 알프스 봉우리들이 우리를 반겨줬다. 전망대 난간에 기대어 산맥의 결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대각선 위로 길게 뻗은 빙하와 조그맣게 보이는 오두막집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설마 저런 곳에 사람이 살 리가' 하고 빤히 보고 있으니 수지가 웃으며 설명해 준다.
"저곳은 이 지역 빙하 트래킹을 하는 산악인들이 등산하다가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산장이란다. 나도 몇 년 전에 친구들과 빙하 트래킹을 하면서 저곳에서 하루 묵었었지. 이틀 정도 등산을 했는데, 특수 장비와 가이드와 함께하면 빙하 위도 걸어볼 수 있어. 나중에 원한다면 빙하 트래킹도 같이 가보자꾸나 ㅎㅎ."
빙하 위를 걷다니, 차원이 다르구나. 나도 나름 등산을 좋아하고 즐긴다고 자부했었는데, 수지는 말 그대로 '어나더레벨'에 있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평생을 알프스 곁에서 산다면 충분히 그럴 법도.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멋진 삶을 사는 수지를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 역시 언젠가 빙하 트래킹에 도전해 볼 수 있을 거라는 작은 용기가 생겼다. 인생에서도 아직 도전하지 않은 새로운 길들이 있을 거라는 믿음에 다시 한번 반짝 불꽃이 튀는 마음. 구름 사이로 살며시 얼굴을 내미는 마테호른도 "조금 더 멀리 가보라"라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