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한 스위스에 따뜻한 이탈리아 한 스푼
알프스의 푸른 능선 아래, 살랑대는 야자수 옆으로 멋들어진 클래식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호반 도시. 루가노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 나는 이곳이 스위스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따사로운 햇살 속을 여유롭게 걷는 사람들, 에스프레소 향이 진하게 풍기는 골목길, 상점가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이탈리아어. 스위스의 전체적인 질서정연함 속 이탈리아의 따뜻한 감성이 살아 숨 쉬는 정돈된 풍경이 '루가노'라는 이름 아래 한데 어우러져 있다. 기분 좋은 낯섦이 또 한 번 감각을 자극한다.
베른에서 취리히나 루체른으로, 거기서 다시 루가노로 가기까지 기차로 약 3시간이 넘는 여정. 허리에 길게 놓인 알프스 때문에 좁은 터널과 우회로를 여러 번 지나가긴 하지만, 열차 레스토랑 칸에서 조각 케이크, 커피 한잔과 함께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음미하다 보면, 어느샌가 안내 방송에 또렷한 이탈리아어가 들리며 스위스 최남단 도시 루가노에 다다르게 된다.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한눈에 들어오는 시가지의 전경. 언덕에서부터 도시로 이어지는 작은 골목길과 귀여운 푸니쿨라, 오랜 세월을 품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건물 뒤로 솟아오른 뭉툭한 모양의 산들과 어김없이 자리 잡은 알프스의 호수까지. 입구에서부터 숨 멎을 듯 아름다운 루가노의 모습을 파노라마 뷰로 감상하며 이곳만의 특별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낀다.
루가노가 속한 티치노주는 스위스 내에 유일한 이탈리아어권 지역으로 이탈리아 북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탈리아와 독일을 잇는 거점 역할을 하면서 발전해 온 루가노는, 오랜 시간 북부 이탈리아 지역의 영향을 받아 1513년 스위스 연방에 편입된 후에도 특유의 이탈리아식 전통과 생활양식을 유지해 갔다. 특히 16세기 종교개혁의 바람이 독일과 스위스를 휩쓸고 지나갈 때도, 이곳만은 조용히 가톨릭의 뿌리를 붙잡고 있었다.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꾸준한 믿음을 택했던 이 땅. 수세기가 지난 지금도 루가노에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의 교회들이 살아 숨 쉬고 있고, 주민들은 성인(聖人) 기념일과 축제를 챙기며 가톨릭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푸른 종탑이 우뚝 솟아있는 산 로렌초 대성당 (Cattedrale di San Lorenzo) 안으로 들어가 보면, 둥근 돔 지붕을 떠받치는 섬세한 프레스코화, 금박으로 뒤덮인 벽과 기둥의 장식들이 전형적인 이탈리아 북부 성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들어오는 황금빛 햇살을 맞으며 나무 벤치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는 여인. 제단 앞으로 다가가 촛불을 붙이고 성화를 바라보는 청년. 뒤에서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성스러움이 깃드는 것 같다. 그런 맑고 정성스러운 마음들이 모여 루가노가 끊임없이 정화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에 잠긴다.
남쪽으로 내려오니 음식이 더 싸고 맛있어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갓 구운 빵과 고소한 에스프레소를 내어주는 카페와 "Ciao Bella"를 외치며 신선한 젤라또를 휘리릭 퍼주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학교 앞에 있는 작은 피자가게조차도 동네에서 유명한 맛집이라고 하니 다이어트 생각은 이미 머릿속 어딘가에 뒷전으로 밀어둔 지 오래다. 베른이라고 이런 카페와 식당들이 없는 게 아닌데, 이상하게 루가노에만 오면 입맛도 더 좋아지고 지갑도 더 자주 열게 되는 것 같다. '루가노잖아' 라며 하루에 젤라또를 두 번씩 먹는 나에게 셀프 면죄부를 주기도 하면서... :)
도시 중심에 위치한 치아니 공원(Parco Ciani)을 따라 루가노 호숫가를 산책하면서 북쪽으로 올라가 보면 'LIDO'라고 적힌 커다란 건물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어로 '공공 해변'이라는 뜻을 갖는 리도(Lido)는 바다가 없는 스위스 남부지역에선 공공 수영-휴양 시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독일어권 스위스에서는 'Strandbad'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호숫가와 바, 레스토랑, 수영장 등 여러 가지 편의시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입장료 10프랑가량을 내고 들어간 루가노의 리도에서 친구와 함께 오후를 보내기로 한다. 흔히 해수욕장 하면 떠오르는 북적대는 인파,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 정신없는 음악소리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정갈하고 쾌적한 수변공간이 우리를 맞이해 준다. 사람들이 쉬고 있는 잔디밭 앞으로는 인공 모래사장이 깔려있어 실제로 해변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짜디짠 바닷물 내음이 나지 않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
모래사장과 연결된 루가노 호수 한쪽에서 신나게 놀다가, 어디선가 자꾸 풍덩풍덩 입수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맞은편에 있는 다이빙 타워가 눈에 들어온다. 스낵바에서 가볍게 허기를 달래고 반대쪽으로 가보니, 우리가 있던 모래사장과 맞먹는 사이즈의 대형 야외 수영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세상에 호수와 해변, 수영장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니! 퀄리티도 퍽 좋아서 입장료 10프랑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2m 깊이의 수영장에서 친구와 열심히 자유형 연습도 하고, 조금 더 얕은 풀에서 물싸움도 하다가, 체력 이슈로 물 밖으로 나와 호수 앞 모래사장으로 돌아갔다. 이제 어르신들을 따라 비치타월을 깔아놓고 일광욕을 즐길 차례. 행복 뭐 별거 있나, 단잠이 찾아온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나온 저녁 산책. 낮 동안 쨍했던 해는 천천히 루가노 호수 건너편 산 뒤로 내려가고, 구름이 몰려오며 저녁 하늘을 짙푸르게 덮는다. 시가지 뒤편에 놓인 몬테 브레(Monte Brè) 산 위의 집들과 도심의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히며 마을을 주황빛으로 물들인다. 한결 시원하고 차분하고 고요해진 거리. 머릿속을 맴도는 번잡한 고민들도 이 순간만큼은 가만히 잠들어 있는 것 같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참 좋다는 단순한 감정만 남는다.
여름향 잔뜩 묻은 평온함, 이래서 다들 여름만 되면 루가노를 찾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