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코나(Ascona), 아늑하구나

스위스 남부 작은 마을에서 누리는 Dolce Vita

by FrauChoi
이른 아침, 비교적 한적한 아스코나 시내


루가노에서 기차를 타고 위로 1시간 반 정도 거슬러 올라오면 도착하는 티치노주의 소박하고 아담한 휴양 마을 아스코나. 루가노가 티치노주를 대표하는 이탈리아풍의 세련된 도시미(美)를 내뿜는다면, 아스코나는 훨씬 더 수수하고 여유롭고 살가운 마을의 분위기를 풍긴다. 부산에 있다가 기장을 간 느낌에 맞먹는 정도. 따스하고 아늑한 분위기와 골목 곳곳에 숨은 맛집에 더해, 유럽에서 영화제로 명성이 드높은 로카르노(Locarno)를 바로 맞은편에 두고 있어 여름-가을 시즌에 많은 관광객들이 아스코나에 발을 들인다.


우리의 경우, 얀네 가족 친척들이 다 함께 사용하는 여름별장이 아스코나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1~2년에 한 번씩은 여름휴가철에 맞춰 이 지역을 찾는다. 베른에서부터도 너무 멀지 않은 거리에 바캉스 느낌 제대로 나는 휴양지들로 가득한 티치노주. 옛날부터 베른 인접 지역에 쭉 살아오셨던 할머니 할아버지와 그 윗세대 어르신들도 같은 이유로 이곳에 터전을 마련하시고 삶을 즐기시지 않으셨을까. 스위스에 살면 이런 삶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겠구나,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계곡에서 먹을 삼겹살, 라면, 김치가 없어 아쉬운 한국인


마을에서 북쪽으로 20여분을 달려 마지아 계곡(Valle Maggia)에 도착했다. 어릴 적 가족들과 피서지로 종종 갔었던 우리네 계곡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어 반가운 마음이었다. 저 차가운 물 위에 커다란 수박 하나 띄워 놓고 가까운 물가의 캠핑존에서 삼겹살, 김치, 라면까지 세트로 해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군침부터 흘리는 나는 영락없는 한국인. 그러는 사이 얀과 그의 친구 프레드는 후다닥 윗도리를 벗어던져두고 건너편의 삐쭉 솟은 바위 위를 오른다. 저 영락없는 스위스인들.


물의 깊이를 확인하고는 완벽한 포즈로 다이빙에 성공하는 우리 스위스 친구들. 소리만 들어도 시원해서 그냥 구경만 하려고 했더니 방금 입수하고 나온 정승 같은 두 사내가 나를 물속에 던지려 다가온다. 좋은 말할 때 자진입수 하겠습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계곡물을 몸에 끼얹고 적당한 높이에 있는 바위까지 걸어 올라가 물속으로 마음만은 멋지게 몸을 내던졌는데, 생각처럼 몸이 아치형으로 굽어지지 않고 평평하게 떨어져 배가 수면에 '철퍼덕'하고 그대로 부딪혀버렸다(;;). 어찌나 민망하고 아프던지. 철썩 소리에 놀란 얀과 친구들이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나의 복부를 보며 웃픈 표정을 지었다. 스위스 계곡에서의 신고식, 제대로 치른 듯하다.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자세로 다이빙을 선보이리라.




맛집이 귀한 스위스에 숨어있는 찐맛집, 그로또 발도리아


즐거운 물놀이 후 아스코나로 돌아와 허기진 배를 채우러 그로또 발도리아(Grotto Baldoria)로 향한다. 이 지역에 오면 반드시 들려야 하는 우리의 참새 방앗간과도 같은 곳. '그로또(Grotto)'란 이탈리아어로 식품 저장을 위한 천연 동굴이나 지하공간을 의미하는데, 시간이 흐르며 그 근처에 야외 테이블이나 벤치를 마련하고 소박하게 식사를 하는 문화가 생겨나면서 현재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가정식 식당을 그로또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역별로 다양한 그로또가 있는 티치노주. 그중에서도 우리가 가는 아스코나의 그로또 발도리아는 얀 할머니 때부터 가족들이 찾아가는 전통 있는 가게로 예약 없이는 착석조차 하기 힘든 '찐' 로컬맛집이다. 입구 바로 앞까지 꽉 들어찬 자리를 보며 맛집의 아우라를 실감한다.


인파를 뚫고 안내받은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곧장 음식이 나왔다. "아직 메뉴판도 못 봤는데?" 하고 어리둥절해하니 프레드의 와이프 릴리가 여기선 그냥 주는 대로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된다고 나를 안심시킨다. 너무 좋은걸, 이런 콘셉트!

가정집 물병에 가득 담겨 나온 레드와인과 함께 손바닥만한 살라미를 시작으로 빵, 샐러드, 파스타, 폴렌타, 치즈 플레이트에 디저트까지. 투박하고 간단해 보이지만 맛은 전혀 간단하지 않은 음식들의 향연이 코스로 두 시간가량 이어졌다. 시원한 나무그늘 밑에 앉아 와인을 홀짝홀짝 들이키며 이탈리안 엄마 손맛이 잔뜩 들어간 음식을 즐기다 보니 바지단추가 풀리는 건 당연지사. 얀과 프레드는 입가심으로 이탈리아 증류주인 그라파(Grappa)까지 클리어하며 완벽하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정겹고 매력적인 미식 경험, 그로또에 또 가고 싶어 여름이 기다려진다.




물놀이 후의 피곤함과 그로또에서의 포만감, 저녁 공기의 나른함이 동시에 몰려오며 눈꺼풀을 추욱 누른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넷이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풀린 눈으로 친구들의 수다를 엿듣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버스의 리듬과 함께 신들린 듯 헤드뱅잉을 하다 힘이 빠져 옆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고 보니,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얀이 아닌 프레드라는 사실에 흠칫 놀라 일어나며 "sorry"를 마구마구 연발했다. 그걸 한 세 번은 더 반복했으려나. 잠결에 기절했다가 허공에 사과를 쏟아내는 나의 유교걸 모먼트가 우스꽝스러웠는지, 프레드와 릴리는 지금도 나를 보면 이따금씩 그 이야기를 꺼내며 껄껄 웃는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고 어찌저찌하여 집에 도착. 포도밭과 야자수가 평화로이 자리 잡은 조용한 산골마을 속 오래된 얀 가족들의 거처다. 집 근처의 시원한 계곡에서 올라오는 찬 공기와 맑게 울려 퍼지는 교회 종소리 덕분에 피로가 좀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곧바로 샤워를 하고, 발코니에 모여 냉장고에 시원하게 보관해 둔 레몬맛 리큐르 리몬첼로(Limoncello)를 나눠 마시며 여름밤의 정취를 즐겼다. 풀내음 풍기는 듯한 풀벌레 소리. 별 말 없이도 편안히 흐르는 공기.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니 금세 그득히 차오르는 마음.

하나둘 켜지는 별빛 아래로, 리몬첼로가 찰랑이는 잔을 부딪히며 외쳐본다. "La Dolce V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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