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천천히, 스위스의 심장 속으로
(몇 년 전, 베개에 얼굴 뭉개고 영상통화 중)
나: 우리 나중에 스위스에서 살게 되면 어느 도시에서 살게 될까?
얀: 당연히 베른이지!
나: 나도 베른이 제일 좋은 거 같긴 해. 그래도 혹시 다른 후보들도 있다면?
얀: 루가노 정도..? 근데 베른만 한 데가 없어 베른으로 가자 ㅎㅎ
열렬히, 또 지고지순하게 베른을 사랑하는 얀 덕분에 나의 스위스 메모리 역시나 반절 이상이 베른으로 채워져 있다. 영롱한 에메랄드 빛을 뿜어내는 아레(Aare) 강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중세도시. 구시가지 아케이드 양옆으로 휘황찬란하게 펄럭이는 스위스와 베른, 상인연합을 상징하는 깃발들과, 강 건너편 한구석 덤불 사이를 한가롭게 노니는 곰 세 마리의 걸음걸음을 다리 너머로 지켜보고 있노라면, 잠시 내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6년 전 처음 베른을 마주했을 때도, 베른에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이곳이 뿜어내는 정취는 여전히 어딘가 이질적이면서도 아늑하다.
엽서 속 그림 같은 풍경 너머로 보이는 베른의 또 다른 얼굴. 명실상부 스위스의 중앙행정도시로 주요 정부기관과 대사관이 밀집해 있는 만큼 이 구역만의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구시가지 중앙부에 위치한 국회의사당(Bundeshaus) 건물 입구는 삼엄한 경비태세를 갖춘 보안요원들과 시설들로 감시되고, 건물 기둥 위쪽에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26개의 주(Kanton)의 문장들이 위풍당당하게 스위스 정부의 위엄을 드러낸다. 수백 년에 걸쳐 정착된 민주주의 전통과 시민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만의 독특하면서도 안정적인 정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스위스. 이런 체계를 성실히 지켜가는 이 나라의 공직자들이 부쩍 존경스럽기도 하다.
도시의 멋과 중요성도 베른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핵심요소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우리가 이곳을 사랑하는 이유는 베른 특유의 포근함과 살기 좋음 때문이지 않을까. 스위스 5대 도시라고 불리는 취리히, 제네바, 바젤, 베른, 로잔에서 베른은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에 비해 인구수가 적어 도시 자체에 여유로움이 많이 묻어있고, 사람들도 '빨리빨리' 보다는 '느린 것'에 더 익숙한 삶을 산다. 특히 취리히나 제네바를 다녀오고 나면 베른이 새삼 조용하다고 느껴질 정도. 하지만 베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로컬한 감성이 묻어나는 힙한 카페와 레스토랑, 힙합과 재즈 공연이 열리는 공연장, 박물관과 미술관이 밀집한 문화 지구, 캠핑과 바비큐를 즐길 수 있는 수변 공원 등, 다양한 공간에서 유기적이고도 활기찬 삶이 펼쳐지고 있다.
얀과 친구들과 함께 베른 현지 클럽에서 열린 힙합 콘서트를 처음 갔던 날, 예상치 못한 그들만의 매니악하고 에너지 넘치는 현장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또렷하다. 밖에선 참 순하고 점잖은 사람들이 안에선 이렇게 미치광이(?)처럼 놀기도 하다니. 작정하고 노는 걸 즐기는 나로서는 반가운 광경이기도 했다. 마냥 다른 존재 같던 그들과 내적 친밀감을 갖게 된 그날 밤, 낯선 음악과 몸짓 사이에서 쭈뼛거리던 나는 술의 힘으로 이내 그들과 하나가 되어 알지도 못하는 독일어 랩의 후렴구를 밤새도록 따라 불렀더랬다. 얼마나 불렀던지, 제목도 모르는 그 노래의 가사가 아직도 머릿속에 맴돈다.
Fischermätteli Hood Gäng mir si Hepfe!
봄이긴 하지만 날씨가 심하게 변덕을 부리는 4-5월을 보내고 나면 우리들의 마음은 일찌감치 아레강으로 향한다. 따사롭다 못해 쨍쨍 내리쬐는 햇볕을 핑계 삼아 아직 꽤 차가운 빙하수에 신이 나서 몸을 내던지는 청년들, 드넓은 잔디밭에 수건 하나 깔고 누워 비키니 차림으로 태닝 하는 언니들, 강가 옆 팝업 바에서 그 모습을 감상하며 드링크를 즐기는 손님들, 입안 가득 달콤한 젤라또를 떠먹으며 뛰어다니는 꼬맹이들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베른사람들의 여름나기는 오뉴월부터 슬슬 시작되다가 8월이 되면 정점에 달하는데, 이때가 되면 아레강은 물 반 사람 반인 천연 유수풀장이 되고 수변공원 앞 젤라떼리아에 서있는 줄은 거의 마을을 한 바퀴 휘감을 수 있을 정도로 길어진다. 사람들이 몰리면서 생기는 애로사항들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연 속에 한데 모여 다 같이 즐기는 여름이기에 아레의 여름은 내 기억 속에서 더욱 빛이 난다.
여기서 여름 아레강 액티비티의 하이라이트, Aareböötle[아레뵈틀레]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베른에서 남동쪽으로 30분 정도 떨어진 툰(Thun) 호수의 지류에서 시작해 약 3시간가량 소형 고무보트를 타고 아레강 유역을 즐기며 베른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일컫어 아레뵈틀레라고 한다. 보통 세네 명이 한 조가 돼서 보트를 타는데, 코스 자체는 전반적으로 험하지 않지만 중간중간에 유속이 갑자기 빨라지는 구간이나 소용돌이가 있는 구간이 있어서 보트를 많이 타본 현지인 멤버가 최소 한 명은 있는 게 마음이 편하다 (우리 배에는 두 명이 유경험자였는데 그럼에도 소용돌이 구간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배에 물이 와장창 들어와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난이도 있는 구간들이 몰려있는 초입부를 지나오고 나면 아주 평화로운 드라이브가 이어지고, 여기서부터 각자 미니스피커를 연결해 음악을 틀거나 준비해 온 간식을 먹거나 보트 밖으로 뛰어들어 흐르는 아레강에 몸을 맡긴다. 유속이 꽤나 빠르고 물은 바닥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기 때문에 구명조끼는 필수. 처음에 입수했을 때 물이 너무 차갑고 뭔가에 내 몸이 휩쓸려가는 느낌이 들어서 엄청 호들갑을 떨었다가, 옆에서 평화롭게 유영하던 다른 친구와 호흡을 맞추고 물장구를 치다 보니 금방 적응이 되어 물 만난 개 마냥 신나게 수면 위를 헤집고 다녔다. 뚱이 마냥 불가사리처럼 물 위에 누워 멍 때리고 있던 얀한테 물세례를 퍼부었다가 되려 응징당해서 꼬로록 꼬로록 물도 먹고, 지나가는 다른 보트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에 맞춰 어깨도 들썩들썩해주고.
그렇게 물에서 놀다가, 보트 위에서 놀다가, 노도 열심히 젓다가 하다 보면 어느새 보트와 사람들이 북적이는 지점에 모이게 되고 점점 가까워지는 국회의사당 건물을 끝으로 지정 구역에 보트를 정박시키면 세 시간의 여정이 끝이 난다. 내 느낌엔 한 시간도 안 지난 것 같았는데! 햇볕이 내리쬐는 잔디밭 위, 옷가지와 고무보트를 말리면서도 아쉬워서 친구와 아레강에 두어 번 더 뛰어들었다. 물에 너무 많이 들어가서 집에 갈 때쯤엔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만서도 금방 다음 여정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 몇 달 남지 않은 올여름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쌀쌀해진 공기에 따뜻한 음료 생각이 간절해지는 초겨울 시즌이면 베른 시내는 느닷없이 형형색색의 양파(!)로 물든다. Zibelemärit[찌블레메릿]이라고 불리는 베른의 양파 축제는 매년 11월 네 번째 월요일에 열리는 스위스의 민속 축제로, 현지 농부들이 직접 재배한 양파를 화려하게 꼬아서 장식하거나 꽃다발처럼 만든 양파부케, 알록달록한 양파 모양의 알사탕 목걸이, 양파를 활용한 각종 음식 등을 길거리 시장에서 판매하며 지역 농민 공동체의 연대와 전통을 기념하는 문화 행사이다. 축제날 시내에 나가보면 스위스 전통의상인 드라흐트(Dracht)를 입은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지나가는 족족 환호성을 지르며 컨페티를 뿌려대는 아이들 덕분에 흥이 저절로 난다 (이때 옷에 묻은 컨페티 가루가 내 눈에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석 달은 더 걸렸지만). 일찍 가야 더 재밌다는 말에 자신 있게 아침 9시쯤에 버스정류장에서 보자고 친구들한테 제안했더니, 그때 가면 양파 캔디가 다 팔리고 없을 거라며 6시 반까지 나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뭔 놈의 축제를 그렇게나 일찍 하는거야...
부은 눈에 볼캡을 쓰고 어기적어기적 시내로 향했던 다음날 아침, 거리는 이미 꼭두새벽부터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부지런한 농부들의 일과를 기리기라도 하듯, 유독 예쁜 연보랏빛 아침 하늘을 배경 삼아 양파로 올망졸망 장식된 거리를 지나다보니 한결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 한술 더 뜨는 우리 유러피안 친구들은 아침 7시부터 알코올이 들어간 글뤼바인을 마시며 찬 공기로 부터 몸을 데우곤 했다. 음... 따뜻한가봐 :) 결국엔 나도 2, 3차 글뤼바인 구매에 합류하여 양파케이크 한 조각과 함께 모닝 알코올을 즐겼다. 축제는 역시 즐겨줘야 제맛이지.
첫만남의 설레임과 여기, 지금 나의 일상을 품은 베른. 이 곳에서의 하루하루를 통해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람 간의 조화를 느낀다. 아레강을 따라 흐르는 이 도시의 리듬 속에서, 나는 좀 더 본질적인 삶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오래된 시계처럼 천천히, 하지만 정교하게.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익숙해진 풍경을 벗삼아 낯선 사색에 잠기며, 오늘도 나는 베른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I ha di gärn은 베른 독일어로 '너를 사랑해'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