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시작되는 기억
2019년 겨울, 처음 스위스를 만난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착륙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눈 덮인 알프스와 설원 위에 옹기종기 모인 빨간 지붕들의 광경은 나를 곧장 동화 속 어딘가로 데려다 놓았고, 비행기가 활주로에 들어서고도 나는 한참을 창가에 붙어 다물어지지 않는 입으로 그 황홀경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지구상에 존재하다니! 때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 한창이었던 지라 온 동네가 트리와 산타, 금빛 장식으로 물들어 있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빨개진 볼에 손을 포개고 글뤼바인(Glühwein)을 마시며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행복이 잔뜩 녹아있는 그 풍경을 눈에, 마음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런 어여쁜 스위스를 쏙 빼닮은 나의 사랑스러운 연인이자 지금의 남편인 얀을 보기 위해 처음 방문하게 된 스위스. 도통 알 수 없는 언어가 적힌 표지판들과 춥고 흐린 날씨에도 이상하리만치 평화롭던 행인들의 모습이 낯설다가도, 그로 인해 들뜬 마음이 진정되기도 하고 어딘가 묘하게 편안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일찌감치 그렇게 스위스에 스며들었던 걸까. 이후 천천히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 때도 약간의 덜컹거림은 있었을지언정 커다란 거부반응에 부딪힐 일은 없었다. 물론 아직도 해결해 나가야 할 숙제들이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스위스 독일어라던지 스위스 독일어라던지..).
스위스의 풍경과 분위기가 주는 푸르름, 잔잔함, 아늑함, 여유로움이 좋다. Coop에서 대충 고른 크로와상과 커피 한 잔,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책 한 권만 있으면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여정도, 호숫가에 앉아서 오후를 보내는 것도 낭만이 된다. 도파민 촉진의 시대에 숨통이 탁 트이는 기분. 지나가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인사말을 건네는 동네 어르신들의 따스함은 덤이다.
지난 6년간 조금씩 안면을 트다가 이제는 삶의 터전이 된 스위스에서, 특별한 추억과 애정을 머금은 곳들을 이야기로 풀어내본다. 마음 한편에 오래도록 머무는 나만의 풍경이자 시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마음속에 고이 간직된 그러한 풍경들을 떠올려 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