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또 다시 대체 가능성이다.
AI의 출시 이전에도 우리의 조직생활에서 대체 가능성은 늘 화두였다. 인간은 그간 다른 인간과 경쟁해왔다. 사람들은 조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내 옆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로 얼굴을 알릴 필요성이 컸다. 조직원들은 누군가에게 밀려서 팀장에서 물러나게 되고, 리더에게 인정받아 팀장이 되기도 한다.
비단 팀장만의 일이랴, 조직에서 돈을 받는 입장에서는 조직이 나를 계속 고용할 이유를 찾아야 했다. 노동자의 입장뿐만 아니라 고용주의 입장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20:80 법칙(파레토 법칙)을 적용한다.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토지의 80%를 20%의 인구가 소유한다"는 현상을 발견한 이후, 이 법칙은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대표적으로 GE의 잭 웰치는 매년 조직 구성원을 상위 20%, 중간 70%, 하위 10%로 나누고 하위 10%를 해고하는 "활력 곡선(Vitality Curve)"을 실행했다. 조직은 AI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사람을 등급화하고,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관리해온 것이다.
AI는 이 오래된 질문의 수위를 한 단계 올렸다. "A를 내보내고 B를 앉힐까?"가 아니라 "A와 B 모두 쓰지 않고 AI를 쓰면 되는 것 아니야?"라는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경영진의 눈에는 그렇다. 그렇다면 당사자의 눈에는 어떨까?
발거벗은 기분
이 정체성의 문제는 파레토 법칙에서 20% 이내의 인재가 아닌 나머지 80%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신입사원 때엔 "도대체 저분은 회사에서 뭐하실까?" 생각이 드는 미스테리한 분들이 계셨다. 몇 년 일하다 보면 "나는 뭐하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고, 나중엔 그 미스테리했던 분들과 함께 "우린 뭐하고 있나?" 하면서 스스로의 좌표를 잃어버린 사람들과 동질감이 생기곤 한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런 현상을 "불셋 잡(Bullshit Jobs)"이라 불렀다. 본인조차 존재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직무가 조직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YouGov의 설문에서 영국 직장인의 37%가 "내 직업은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그레이버의 표현이 다소 거칠긴 하지만, 분업화된 조직에서 내가 맡은 업무만 반복하면 전문가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 전문성은 조직이라는 틀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일 수 있다.
특히 일의 실체 없이 자리만 지키며 돈을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나만이 갖고 있는 무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불편해진다. AI가 조직에 들어오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재조명했을 때 "벌거벗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다만 조직이라는 건물 안에 있었기에 자신의 실체를 모르고, 무엇인가 걸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제는 그 건물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옷이 없어 매우 춥겠다는 고민에 빠진 것 같다.
그렇다면 조직에서 특별하지 않았던 사람은 정말 끝인가?
보편적 존재의 가치
전체적인 논조를 흐리는 질문이긴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한 직장에 오래 머무는 것 자체가 그 회사의 자산이라 생각한다.
앞서 마이클 폴라니의 말을 빌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이 "암묵지(Tacit Knowledge)"가 바로 오래 머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일의 히스토리를 알고,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가령 5년 전 거래처와 마찰이 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면, 매뉴얼에는 없지만 회사의 손실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AI가 데이터를 처리하고 보고서를 뽑아낼 수는 있지만, "그 거래처 담당자가 바뀌었을 때 분위기가 어땠는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문서에 기록되지 않은, 경험 속에만 존재하는 판단의 근거 — 이것이 암묵지이고, 조직에 오래 있었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누군가가 특출난 것은 누군가가 평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축구팀에 11명이 전부 스트라이커면 팀이 돌아가지 않듯, 조직도 묵묵히 중간을 채우는 사람이 있어야 돌아간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보통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또다시 20:80이 생길 뿐이다. 결국 파레토 법칙의 80%는 고정된 등급이 아니라 상대적인 분포다. 이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보편적 존재가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보편적으로 살도록 설계된 구조 안에서, 한 번도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 시절 우리가 받았던 교육
대학교 1, 2학년 때의 일이다. 군대는 어디로 가면 좋은지 몇 개월째 주변에 물어보고 다녔다. 결국 선배들이 가지 말라는 102보충대를 지원해서 강원도 철원의 차디찬 바람을 맞고 왔다. 그 경험이 쓰라려서인지, 이후엔 내 진로를 가지고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내가 속할 조직에 대한 숱한 저울질을 해대던 것 같다.
이처럼 내 결정에 있어서 눈치를 보고 남들 가는 길을 따라갔던 건, 나를 비롯한 동시대의 많은 친구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윗사람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 내가 속한 무리에서 벗어나면 위험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좋은 대학 → 좋은 회사 → 안정적인 생활"이라는 공식이 있었다. 이 공식은 결국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내가 어디에 속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였다. 켄 로빈슨 경은 TED 강연 "학교가 창의력을 죽인다(Do Schools Kill Creativity?)"에서 현대 교육 시스템이 산업혁명 시대 공장 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지적했다. 앞서 포디즘과 테일러리즘이 조직을 분업화하고 인간을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만들었다면, 교육은 그 부품이 되는 법을 가르쳐온 셈이다. 분업화된 조직은 인간에게 안정을 줬지만, 동시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극도로 좁혀놓았다.
이런 구조 안에서 "대체 불가능한 나"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소속이 곧 안전이었으니까. 하지만 점차 조직의 보호 기능이 약해지고, AI의 등장을 맞이하며 "조직에 속하고, 순응하는 것"만을 강조해온 우리에게 큰 물음이 던져졌다. 소속이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가 왔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조직이라는 건물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우리가 그 밖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