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귤 Jan 09. 2025

목숨을 건 일

그것을 기다리다


조금 잠잠해지고 나니 과일이 먹고 싶어졌다.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에 나와 남편과 둘이 먹는 과일은 꿀맛이었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묻는다.


"화장실에서 울어본 적 있어?"


"응. 나 엊그제도 변기통 잡고 울었잖아. 오빠 화장실에서 울었어? 오늘?"


"어..."


"왜? 똥 안 나와서?"


남편이 웃는다.


"아기 어플에 뜨는 글 보다가 울컥해 가지고..."


"진짜? 회사에서? 뭐라고 적혀있었길래?"


"엄마는 목숨을 걸고 아기를 낳는다잖아. 안 그래도 너  응급실 갔다 왔는데 이거 읽고 너무 슬퍼가지고..."


남편 말을 듣자마자 내 눈에서도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남편이 내민 핸드폰 속, 임신 기록 어플에 뜬 문구이다.


"출산은 목숨을 건 일이에요. 엄마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기를 낳는 건 목숨을 건 일인데 그 일을 엄마라는 사람들은 기꺼이 기다린다는 것. 그 말이 왜 이리 가슴에 콕 박히는지. 며칠 전 입덧으로 피를 토한 직후라 그런 건지, 임신 호르몬 때문인 건지, 부모라 그런 건지, 자식이라 그런 건지, 여자라 그런 건지, 사람이라 그런 건지, 무서워서 그런 건지, 힘들어서 그런 건지, 기다려져서 그런 건지, 소중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첫째 때 유독 입덧을 심하게 했기에 걱정이 되었지만 혼자 노는 첫째의 뒷모습을 보며 과감히 둘째를 계획했고, 역시나 입덧으로 고생했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시간이 흘러 흘러 난 지금 셋째를 임신했다. 셋째인데도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더라.  6주에 접어들며 본격적인 입덧이 시작되었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과 컨디션, 그 속에서 돌봐야 할 아이 둘. 평범한 일상을 이어나가는 것이 너무 무섭게 느껴지던 시간들을 보냈다. '그래도 첫째에 비하면 지금은 뭘 먹고 나서 토하잖아.'라고 위안을 삼았지만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임신 13주를 코앞에 앞둔 엊그제 새벽. 오후부터 시작된 토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결국 피가 나고 갈색 토와 와인색 토를 번갈아가며 하다 응급실로 향했다. 자고 있던 두 아이까지 데리고 가면서 나는 자책했다. 누구를 위한 일인가? 과연 잘하는 일일까? 내가 이렇게까지 미련하고 멍청한 사람이었나? 어떻게 이 고통을 또 자초했을까? 곁에서 지켜보는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미안하기만 했다. 아는 고통이라 더 두렵고 앞이 깜깜했다.

'입덧이 잦아드는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면? 언제까지 또 참아야 하는 걸까? 이번에도 견딜 수 있을까?'

응급실에서 대기하는 한 시간 반 동안에도 검은 봉지가 가득 차도록 토했다. 피 비린내를 맡으며 울던 날 밤이 지나갔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며칠 전 일이 되었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먹는 일이 매우 조심스러워지긴 했지만 입덧의 상태는 나아졌다. 그날의 고통은 지나갔다. 다음날 진료일을 당겨 찾은 산부인과에서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뱃속의 아기도 만나고 왔다. 다행이다. 지금 살아있는 모든 것이 다행이다. 아픈 순간에 나보다 앞서 아팠던 이들을 떠올렸다. 지금 아픈 이들을 떠올렸다. 나의 아픔은 어쩌면 아주 작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아주 많이 아픈 누군가들에게 이유 없이 미안하고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났다. 누군가 자고 있을 때 누군가는 고통에 깨어 신음하고 있다. 누군가 태어날 때 누군가는 죽는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아픔 속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적어도 함부로 아는 체하지 않아야겠다는 혼자만의 다짐도 해보았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겨우겨우 버틸 뿐이다. 하지만 내 안에 뛰고 있는 작지만 힘찬 심장소리를 듣고 생각했다.

'그래, 어떤 모습이든 살아있다면 산 것으로 충분하구나.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구나. 내 힘으로 버티고 이를 악물면서 사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이 함께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거구나. 나는 결코 내 혼자 힘으로 사는 게 아니구나.'


출산은 목숨을 건 일이에요. 엄마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어요. 삶은 목숨을 건 일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살 길 원해요.


내 옆에, 우리 곁에 목숨 걸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때론 그 모든 걸 놓고 죽고 싶을 만큼 사는 것이 아픈 이들에게 대단하다고, 귀하다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