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로뇨(Logrono)의 새벽이 밝았다. 오늘의 목적지인 나헤라(Najera)까지 가기 위해선 앞으로 약 29km를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어제보다 훨씬 긴 거리를 가야 했기에 오늘은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걸으려했다. 하지만 4시 정각에 울리던 알람은 나를 깨우기에 한참 부족했고, 결국 6시가 다 되어서야 졸린 눈을 비비고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점점 기상시간이 늦어지는 것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어제 푹 쉬고 잘 먹은 덕분일까. 점점 체력이 회복되는 게 느껴진다. 계획보다는 약간 늦어졌지만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로그로뇨는 까미노 위의 있는 도시들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해서 도시를 빠져나가는 데에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도시 곳곳에 있는 화살표를 따라 멍하게 걷다 문득 앞을 보니 작은 호수가 너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한여름 스페인에서 흙바람 맞아가며 땀을 뻘뻘 흘려왔던 최근 며칠 동안 이렇게 예쁜 호수가 가까이에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었다. 호수 위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도시의 가로등 불이 고요히 번지고 있다.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오늘 가야 할 29km의 거리가 떠올라 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뜨면서 서서히 기온이 올라갔고, 길 위의 진흙이 하얗게 말라가고 있었다. 고요함과 적막이 스치는 호숫가를 지나 서서히 높아진 언덕길을 올라오다 보니 저 멀리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키 큰 나무 몇 그루를 지나 소리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분 좋은 바람이 나를 감싸 안는 느낌이었다. 그 곳에 도착하니 3~4명 정도의 순례자들이 간단히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몇몇은 넋을 놓고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 숲길을 지나 온 순례자들이 물가에서 간단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거겠지, 하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내 눈앞에 보인 것은 밝은 은회색으로 빛나는 아주 커다란 호수였다. 아침 해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을 무렵이어서 그랬을까, 약한 비가 소나기를 알리듯 옅은 안개를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일까. 햇빛이 얕게 비치는 호수 앞에서 나를 포함한 순례자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자연이 만들어낸 기가 막힌 이 풍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로그로뇨의 아침을 알리는 새벽안개가 서서히 흩어지며 드러난 호수 위에는 은회색 빛 물안개가 잔잔하게 감돌고 있었다. 안개와 구름, 햇빛이 어우러져 아름답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호수에 도착했다. 수면 위로 살짝 내려앉은 듯한 바람은 한가로이 아침을 맞이하던 백조와 오리가 만들어낸 흔적이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는 더운 여름 낮이 시작되기 전 어서 하루를 준비하라며 모두를 깨우는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들고 있던 등산 스틱을 내려놓고 모자를 잠시 벗어둔 채 이 호수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던 나는 오늘 29km를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곳에서의 감동을 조금 더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어 여기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어제저녁 준비해 온 삶은 달걀과 하몽, 과일 3종류로 만들어진 도시락을 먹으며 이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의 표정을 구경했다. 다들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넋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 이곳에 머무르면서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인사하며 노을을 기다리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한 곳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에 발을 옮겨야만 했다. 호수 한 쪽 끝에 숨겨진 갈대 속의 오리들과 잔디밭에 앉아 털을 고르던 백조, 소나무 숲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던 청설모와 토끼를 지나 계속 걸어가야 했다.
숲을 빠져나와 논길을 걸었다. 적당한 고지대에 울창한 나무들이 많아서였을까. 습도가 높은 편이었는지 달팽이들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500원짜리 동전 크기는 족히 될 만한 달팽이들이 새벽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새벽이슬이 햇빛에 사라질 때쯤엔 거의 수십, 수백 마리가 산책을 나온 것처럼 길에 널려있었다. 길가에 있는 풀에는 이미 크고 작은 달팽이 열댓 마리가 앞뒤로 빼곡히 붙어있어 그 무게 때문에 풀이 길 쪽으로 기울 정도였다. 오랜 시간 걸어온 순례자들은 땅을 볼 여유도 잘 없거니와, 지치고 힘든 다리를 이끌고 걷는 와중에 수십 마리의 달팽이를 신경 쓸 틈도 없어 보통은 의도치 않게 밟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자전거나 농기계에 깔린 달팽이도 많았을 정도로 달팽이 밭이었는데, 순례길을 걸으면서 생명을 죽인다는 게 영 탐탁지 않아 한 마리, 두 마리씩 주워서 다시 풀숲으로 보내줬다.
한, 두 걸음 걷고 쪼그려 앉아서 한 마리 줍고, 또 몇 걸음 걷고 한 마리 줍고. 그렇게 다섯 마리 이상 모이면 강제로 달팽이 가족을 만들어 다 같이 풀숲에 놓아주기도 하고.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달팽이는 데리고 다니면서 이야기하면서 걷기도 했다.
사실 달팽이가 너무 지나치게 많을 때에는 걸으면서 한 마리씩 주워 보내는 게 너무 버거웠던 적도 있었다. 한참을 걷다 주저앉아서 달팽이를 줍고,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열심히 길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달팽이가 너무 야속하고 답답해서 제일 멍청해 보이는 한 마리를 주워 10여 분 동안 호통을 친 뒤 1km 정도 가서 보내줬다. 괜한 심술을 부려봤다. 일찍 일찍 다녀서 사람들한테 밟히지 말라고, 친구들 교통사고 난 거 못 봤냐고, 나 지나가고 나면 너 주워줄 사람 없는데 왜 이렇게 행동이 굼뜨냐고 자꾸 그러면 나 속상하다고 토로하면서 말이다. 이런 나를 보고 외국인 친구들이 했던 말이 있다.
'너 달팽이 주워서 보내는 게 달팽이 입장에서 보면, 생장에서 로그로뇨까지 온 너를 누가 주워서 생장으로 다시 보낸 버린 기분일걸?'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 했다.
열심히 달팽이를 주우면서 걷다 보니 하늘이 점점 어두워진다. 둘러보니 유난히 한 쪽 하늘만 어둡다. 다른 한 쪽은 햇빛이 쨍쨍하고 맑은데 다른 한 쪽은 금방이라도 번개가 칠 것 같았다. 기상천외한 날씨를 구경하며 뒤를 돌아봤는데 보니 저 멀리 아까 지난 호수가 조그맣게 보이기 시작한다. 하늘에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을 모아 땅에 잠시 내려놓는다면, 저 호수처럼 보였을 거야.
곧이어 작은 마을이 나타났고, 마을의 중심에는 성당이 있었다. 성당 안에는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의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마련해 둔 세계 지도가 있었다. 지도상에서 아주 작게 보이는 한국에 빼곡히 붙은 포스트잇이 괜히 마음을 울렸다. 예전에 헬모트, 루비, 메이슨과 수비리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을 때 헬모트가 첫 번째 까미노에서 잊지 못 할 장소가 있다며 사진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본인도 어딘지 정확히는 기억을 못 한다고 했는데, 어떤 성당 안에 들어가서 1유로를 넣으니 성당 안의 장식들에 빛이 들어왔고 세상 그 어떤 성당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종교가 없고 신에 대해 별생각이 없는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요즘에는 성당에도 1유로 장사를 하는구나' 하면서 무미건조하게만 생각했었다. 그리고는 옆을 돌아봤는데 1유로를 넣는 기계가 눈앞에 있었다.
1유로를 넣으니 갑자기 성당 안의 가장 큰 장식에 밝은 빛이 들어왔고, 어둡기만 했던 성당이 차례로 환해졌다. 내가 넣은 1유로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모든 조각상이 나를 축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성당이 주는 웅장함과 정교한 장식에 괜히 긴장되었다. 이 곳의 조용한 실내는 나를 위해 있는 것만 같았다. 1유로를 넣는 성당은 많았지만 헬모트가 말했던 곳은 분명 이곳이리라 확신했다. (후에 지도로 확인해보니 Navarrete라는 마을의 성당이었다.)
아직은 익지 않은 포도나무밭을 지나 알베르게 광고판이 하나 둘 보이는 걸 보니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나헤라(Najera)에 도착해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강이 흐르고 있었고, 한 쪽에는 절벽처럼 보이는 깎아지른 산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었다. 마침 축제날이었는지 아이들과 어른들이 거리로 나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열 맞춰 행진을 하고 있었다. 소나기가 잠시 내렸지만, 알베르게에서 짐을 정리한 후 식사를 하러 밖에 나올 때는 다행히 비가 그쳐있었다. 나헤라에서 다시 만난 한국인 아주머니, 기선씨와 저녁을 같이 먹고 마을을 구경했다.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들른 마트에서 직원과 한참을 웃고 떠든 후 과일을 영업당해 새로운 과일을 몇 가지 골라왔다. 분명 맛있을 거라고 영업했는데 맛이 없었다. 시간이 꽤 지나 어느새 비가 완전히 그쳤고, 사람들은 공원에 나와 운동을 하면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간단히 한 잔 할까 싶어 들린 바에서 상그리아와 양송이타파스를 함께 주문했다.
오늘 29km 가량을 걸어왔지만 이제 슬슬 다리도 25km 이상 걷는 것에 적응이 되어가는 것 같다. 무릎이 아픈 것도 서서히 나아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무릎보호대는 사야 할 것 같아서 약국에 들러 35유로를 주고 하나를 샀다. 이게 베스트라는 약사님의 말에 또 홀랑 넘어가서 큰 돈을 썼다. 아까 먹은 과일같이 겉보기만 좋은 게 아니어야 할 텐데.
어쨌거나 알베르게로 돌아와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이곳 나헤라 알베르게는 저녁 10시부터 아침 6시 15분까지 출입문을 닫아놓는다는 공지가 붙어있었다.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한 통금은 어떤 알베르게나 비슷한 것 같지만 아침에 일찍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다. 너무나 아름답고, 신성했으며, 경이로운 장소들을 길 위에서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한 오늘 하루. 내일도 부디 안전하게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