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차. 양송이타파스 안 먹고 가는 사람이랑 겸상 안해

by 양송이타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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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나(Viana)에서의 아침은 6시에 시작되었다. 오늘은 로그로뇨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을 예정이었기에 느긋하게 아침을 준비했다. 어제 저녁을 같이 먹은 석재오빠와 이야기를 하며 걷던 중 고양이 한 마리가 따라와서 백 미터 가량을 함께 걸었다. 내가 가진 음식이라곤 고양이가 먹으면 안 되는 과일밖에 없었기 때문에 간식으로 줄 수가 없었다. 아쉬웠지만 야옹야옹 울어대는 고양이를 뒤로하고 계속해서 걸었다. 아침부터 고양이를 만나서였을까. 한결 좋아진 날씨와 가벼워진 발걸음이 기분 좋은 하루를 만들어 줄 것만 같았다. 너무 덥지 않게 서서히 떠오르는 햇빛은 단숨에 8km가량을 걷게 해 주었고, 어제 준비한 과일 도시락을 먹을 때 불어온 산들바람은 오늘의 행복을 예고해주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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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로뇨(Logrono)에 도착했다. 로그로뇨는 비아나에서 10km 가량 떨어진 도시로, 순례길에서 맞이하는 대도시 중 하나다. 그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걸어온 것에 대한 보상으로 로그로뇨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길게 보내기 위해 일부러 오전에 도착하는 걸 목표로 했다.


로그로뇨에 들어오면 커다란 벽화가 그려진 건물을 제일 먼저 보게 된다. 포도 모양의 문신이 있는 뚱뚱한 발가락이 꼬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 독특하다. 그림 옆에는 스페인어로 한 문장이 적혀있다. 언어유희로 ETAPAS의 E를 지우고 TAPAS로 표현하였는데, 여기서 TAPAS라는 건 와인과 곁들이는 가벼운 안주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로그로뇨의 TAPAS는 스페인 내에서도 꽤 유명하며, 도시 안에는 TAPAS축제와 거리가 있을 정도다. 한 접시에 1유로 내외부터 있는데 아무리 비싸도 3유로가 넘는 걸 잘 못 봤던 것 같다.


8d일차_3.jpg EL CAMINO DE SANTIAGO SE HACE POR ETAPAS


그만큼 로그로뇨는 부담 없이 많은 타파스를 즐길 수 있는 도시 중 하나다. 타파스 거리에 가면 타파스와 와인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데 한 곳에서 타파스와 와인을 가볍게 먹고, 다음 가게로 이동해서 또 타파스를 먹고. 그렇게 수없이 많은 타파스를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로그로뇨다. 그동안 먹은 순례자메뉴(Menu del peregrino)나 오늘의 메뉴(Menu del dia)와는 다르게 스페인의 유명한 음식들을 가볍게 즐길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상당히 들떠있었다.


로그로뇨에 도착하자마자 순례자 사무소에 들러 지도를 받았다. 오늘은 늦게까지 타파스를 먹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타파스 거리와 가까운 알베르게에 조금 이른 체크인을 했다. 배낭을 알베르게에 맡겨두고 거리로 나왔는데 성당이 알베르게 바로 옆에 있었다. 오늘 일일 동행을 하기로 한 기선씨를 따라 미사를 들으러 갔다. 한국에서도 미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순례길에서의 미사라니, 새로운 경험을 할 생각에 괜히 설렜다.


미사는 종교가 없는 내겐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특히나 이번 미사는 순례자를 위한 미사로 스페인어로 진행이 되었다. 대충 눈치껏 들은 바로는 순례자들의 오늘과 내일을 축복해주는 내용이었다. 한 명씩 호명되어 앞으로 나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아멘을 읊조렸고,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던 몇몇은 통로에 나와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었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눈이 마주치는 주변 사람과 포옹하기 시작했다. 기선씨가 한국어로는 '평화를 빕니다.', 영어로는 'peace'라고 말하면서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미사가 끝났나 싶더니 다 같이 통로에 줄지어 서서 신부님께 무언가를 받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포도주에 적신 빵 조각이나 과자를 받아먹는다고 한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 빵 조각은 성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항상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으로 먹는 거라고. 처음 듣게 된 미사였는데, 엄숙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신성한 의식을 치른 것 같았다. 상당히 좋은 기분이다.


미사를 듣고 거리로 나왔다. 타파스 거리에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었다. 바로 대형마트다. 어떤 나라를 여행해도 대형마트에 가는 게 취미인 내게 대도시의 대형마트는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 중 하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마트에 도착했다. 간식으로 먹을 만한 걸 찾아보았다. 맛있어 보이는 시리얼과 아까 미사 때 사람들이 받은 뻥튀기 과자를 샀다. 스페인, 특히 로그로뇨의 물가가 얼마나 저렴한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하몽, 츄피, 시리얼, 뻥튀기, 요구르트, 복숭아, 오렌지, 멜론을 샀는데 10유로가 채 되지 않았다. 간단히 장을 보고 알베르게로 가서 내일 먹을 아침을 도시락에 담았다. 평소 같았으면 낮잠이라도 잤겠지만, 타파스를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비장한 마음으로 알베르게를 나왔다.




한국인들에게 추천받은 타파스 가게를 찾아갔다. '사마리'라는 이름의 바였다. 타파스 평균 가격은 1.6~2유로 정도. 한 접시당 2천 원 내외였다. 가볍게 두 개의 타파스와 와인을 먹었는데 그럭저럭 맛이 괜찮은 편이었다. 거리를 조금 걷다가 맛있어 보이는 메뉴가 전시되어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내부가 넓고 깔끔했다. 모든 메뉴가 안이 보이는 유리 상자 안에 담겨있었는데, 맛이 없어 보이는 걸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 져 보이는 디저트로 가득했지만, 이곳에 있는 타파스 한 접시의 가격도 역시 1~2유로다.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다 맛있을 거라고 하기에 적당히 메뉴 세 개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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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쪽부터 문어, 소 뽈 살, 대구 타파스

첫 번째 메뉴는 문어(PULPO) 타파스였다. 스페인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뽈뽀는 한국어로 문어숙회라고 생각하면 된다. 순례길 위에 있는 멜리데(Melide)라는 도시의 뽈뽀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해산물로 유명한 스페인인만큼 뽈뽀를 먹어보기로 했다. 올리브유에 살짝 절여진 감자와 촉촉하게 삶은 문어, 그리고 느끼한 맛을 가볍게 잡아주는 향신료가 더해져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접시를 해치웠다.


두 번째 메뉴는 소 뽈 살(CARILLERA) 타파스였다. 소고기라기에 맛있어 보여서 주문했는데 사전을 검색해보니 소 뽈살이었다. 이것도 뽈뽀처럼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아서 없어졌다. 비리지 않고 적당히 고소한 맛에 부드럽고 촉촉한 소고기까지. 전병처럼 생긴 과자가 묽지 않은 양념에 적셔져 식감을 더해주었다.


세 번째 메뉴는 대구(BACALAO) 타파스였다. 문어도 먹고 고기도 먹었으니 이번에는 생선 같아 보이는 타파스를 주문했다. 대구살을 저며 양념을 한 것처럼 보였고,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느껴졌다. 역시 이 타파스도 입에 넣자마자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퍼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한 접시를 더 먹고 있었다.


소 뽈살을 먹을 때는 레드와인을, 대구를 먹을 때는 화이트 와인을 한 잔씩 마시며 바텐더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에 스페인에 여행을 오게 된다면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대신 로그로뇨에 꼭 다시 올 것이고, 이곳에 방문해 다양한 타파스를 더 많이 매일매일 먹기로 굳게 다짐했다.


로그로뇨의 타파스 거리에는 단일 메뉴로 유명한 곳이 있다. 버섯을 요리해 타파스로 만든 곳인데, 내가 갔던 날은 아직 오픈 시간이 안 되었는지 문이 닫혀있었다. 대신 근처에 있는 다른 버섯요리 전문점으로 갔다. 부채꼴 모양의 버섯이었는데 무슨 버섯인지는 모르겠지만 짠맛이 강해서 한 개를 겨우 다 먹었다. 버섯 타파스를 먹고 나와 다음 가게를 물색했다.


괜찮은 타파스 가게가 없을까 싶어 찾는 와중에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곳이 눈에 띄었다. 양송이버섯을 구워 타파스로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다른 메뉴는 없고 오직 양송이 요리만 있는데도 이상하게 사람이 많았다. 와인과 타파스를 합쳐 3유로가 되지 않는 가격이었다. 마늘 소스를 뿌린 양송이와 새우, 그리고 바게트가 한 접시에 겹겹이 쌓여있었다. 바텐더로부터 리오하 지방의 와인을 추천받아 양송이타파스와 함께 먹었다. 타파스 하나를 비우고 난 후에 나는 깨달았다. 앞으로 나는 스페인하면 양송이타파스를 떠올릴 것이라는 걸.


양송이타파스를 만드는 점원


이 날 이후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양송이타파스를 직접 영업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한국에 돌아가면 뭐 할 거냐는 질문에 양송이타파스를 만들어 팔 거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그렇게 맛있냐고 웃으며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양송이타파스를 접한 뒤 내게 연락이 왔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양송이가 있을 수 있냐며.


이 양송이는 보통 양송이가 아니다. 뒤집어 구운 양송이의 물이 고이기 직전에 다시 뒤집어 그 안에 올리브유와 마늘로 만들어진 소스를 가득 뿌려 넣는다. 그대로 한참을 익히며 버섯에 물이 고여 마늘과 어우러질 때면 다시 한번 올리브유와 굵은 스페인 소금을 뿌려 풍미를 돋운다. 그다음 철판의 한쪽 끝으로 양송이를 몰아놓고 약불에 오래 익힌 후, 꼬지에 총 세 개의 양송이를 꽂아 새우로 장식한 뒤 굵게 썬 바게트 위에 올려놓아 마무리한다. 촉촉한 양송이버섯의 향과 올리브유, 마늘, 소금의 조합은 맛이 없을 수가 없지만 철판에 대량으로 구워 새우와 함께 먹는 양송이타파스는 단연 독보적이라 생각한다. 이 날 이후 순례길에서 가끔 보이던 양송이타파스를 절대 지나치지 않게 되었고, 이 날에만 해도 양송이타파스를 혼자서 5접시나 먹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가장 씁쓸했던 건 더 이상 이 양송이타파스를 먹을 수 없겠지 하는 심정이었을 정도였다.









양송이타파스에 잠시 내려놓았던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정신없이 먹은 타파스에 배가 불렀고 조금 걸어서 소화를 시킨 후에 다시 타파스를 먹으러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에서 하는 바이올린 공연도 보고, 유제품 판매점에서 치즈도 구경했다. 후식을 먹으러 들어 간 젤라또 가게에서 어떤 맛을 먹을까 고민하던 중 MAZAPAN이라고 쓰인 게 보였다. 구글에 검색해보니 MAZAPAN은 설탕과 아몬드 가루를 버무린 반죽으로 만든 이탈리아 전통 과자라고 한다. 달달한 곡물 맛이 고소하게 느껴졌다.


MAZAPAN 맛 젤라또

걷다 보니 여기저기 순례자들이 보인다. 몇몇은 묘하게 얼굴이 익숙하다 싶더니 그저께 같이 걸었던 미국인 올리비아였다. 너무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전했다. 올리비아는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 로그로뇨까지 택시를 타고 왔고, 이곳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며칠 동안 머무르며 휴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회복한 후 다시 걷겠다는 올리비아를 응원해줬다. 내일 로그로뇨를 떠나는 나와는 시간이 맞지 않아 앞으로 다신 보지 못 할 것을 직감했다.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순례길에서는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기에, 양송이타파스를 영업하며 서로의 건강을 빌었고 기약없는 다음을 전했다.



도시를 구경하다가 날이 더워지는 것 같아 카페에 들어왔다. 진하게 내린 커피와 츄러스를 먹었다. 간식을 먹고 거리의 예술가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저녁시간이 되었다. 마음의 고향 타파스 거리로 돌아 갈 시간이 되었다. 아까 눈으로 찜해놓은 새로운 타파스 가게로 가서, 아주 큰 가리비에 각종 해산물이 올려진 타파스를 주문했다. 구운 새우와 토마토가 가지런히 꽂힌 타파스와 소 뽈살 타파스도 주문했다. 상그리아를 마시고 알베르게로 돌아가던 중 아쉬운 마음이 들어 인생 양송이타파스를 하나 더 먹었다.


알베르게로 돌아가기 전 작은 마트에서 레몬 맥주(CLARA DE LEMON)와 간식을 샀다. 오늘의 알베르게는 호스텔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라 다른 알베르게에 비해 시설이 좋았고 성당이 가까이에 있어서 위치도 마음에 들었다. 알베르게 바로 앞에는 작은 마트가 있어 간식을 살 수 있었고, 보통 22시에 통금이 있는 알베르게와 달리 자유로운 출입도 가능한 곳이어서 늦게까지 놀 수 있었다. 와이파이도 잘 되는 편이라 오랜만에 사진과 동영상을 백업해두고 음악도 미리 받아 놓았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해 뒀고, 맛있는 음식도 원 없이 먹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너무 행복하고,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이제 로그로뇨에서 양송이타파스 안 먹고 가는 사람이랑 겸상하지 않기로 했다.


양송이타파스는 정말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