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산토스(Tosantos)에서의 아침은 특별했다. 멕시코에서 온 파빌리아와 가족들이 아침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토산토스에서 굉장한 경험을 했던 탓일까, 오래간만에 푹 자고 일어난 느낌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던 탓에 오늘도 아침을 거르고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1층의 식당에서는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고 호스피탈레로가 아침을 먹고 출발하라고 나를 불렀다. 내 몫의 식사를 정중히 사양하고 길을 떠나려는데 호스피탈레로는 물론 미국인 부부까지 나를 꼭 안아준다. 다른 알베르게에서는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상황이라 당황했었지만 쑥스러운 마음이 조금 더 컸던 것 같다. 나지막이 나의 오늘을 기도해주며 나를 안아주는 그들의 모습에 나 역시 마음속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를 했다.
'그대의 하루에 평화가 깃들기를'
생전 처음 보는 나를 위해 누군가가 진심으로 기도해주는 것과 나를 위해 안녕을 빌어준다는 느낌은 정말이지 어색했다. 낯선 이의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탓일까. 하지만 그들의 따뜻한 마음과 진심은 다소 쌀쌀한 오늘의 날씨를 따스하게 녹이기에 충분했고, 내 편이 생긴 듯 한 듬직한 마음으로 기분 좋게 오늘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침을 먹은 카페에서는 콜롬비아의 프란시스코 부부를 또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게 꽤 익숙해졌나 보다. 이렇게 자주 만나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우연으로 시작해 정말 가끔 만나는 인연도 있었다. 뻬뻬와 라이언할아버지가 그런 경우였다.
처음 시작은 정말 우연이었다. 며칠 전 아침을 먹으러 간 카페에서 오렌지주스와 카페라떼, 그리고 빵이 세트인 메뉴를 주문해 기다리고 있었다. 건너편에 미리 와 앉아있던 프란시스코 부부와 이야기하다 내가 주문한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에 그들은 먼저 길을 떠났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어서 비가 그칠 때까지 만이라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내가 자리 잡은 4인 테이블에는 나 혼자 앉아있었기 때문에 남는 의자가 몇 개 있었다. 방금 막 도착한 스페인 할아버지 두 분이, 내가 알아듣지 못 하는 스페인어와 손짓으로 이 의자를 가져가도 되겠냐고 묻는 것 같았다. 안 쓰는 의자이니 가져가시라고 말씀드린 후 비가 그칠 때까지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페인어로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이 좋아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사실 무슨 말씀을 나누시는지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늘 날씨에 관한 것과 목적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 같았다. 카페 여주인과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시면서 커피를 즐기는 두 분의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비가 서서히 그치는 것처럼 보여 나는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앞에 나온 나는 화살표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는데, 눈앞의 갈림길에 화살표가 두 개나 붙어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서 다른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 뻬뻬 할아버지가 스페인어로 내게 뭐라 말씀하셨다.
뻬뻬 할아버지가 영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셨던 까닭에 손짓과 표정, 그리고 스페인어 단어 몇 개로 의미를 유추했어야 했다. 대충 어림짐작해보니 위쪽으로 가는 길은 조금 돌아가는 길이라는 거였고, 아래쪽 길은 바로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아래쪽 길을 선택해 걸어갔고 두 길이 한 길로 합쳐지는 지점이 되어서야 뻬뻬 할아버지가 내 다리를 보며 하셨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위쪽 길도 아래쪽 길도 까미노가 맞지만, 다리가 아파 보이니 조금 더 짧은 아래쪽 길을 가는 게 어떠냐.'
모든 길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순례길이기 때문에, 뻬뻬할아버지와 라이언할아버지는 그 뒤로도 종종 뵐 수 있었다. 내 이름을 발음하는 걸 어려워하셔서 스페인 이름인 'Elena'를 알려드렸고, 짧은 스페인어로 인사를 드리니 정말 좋아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나를 보게 될 때마다 환한 미소로 인사해주셨고, 나는 그 할아버지들을 만날 때 조금 더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틈이 날 때마다 스페인 단어를 하나씩 외웠다. 새로운 단어를 말할 때면 아이처럼 좋아하시던 모습에 나도 많이 기뻤다. 만날 때마다 다리는 이제 괜찮냐며 걱정해주신 덕분에 할아버지를 뵐 때마다 muy bien!(괜찮아요/아주 좋아요!)을 외치며 걸어 다녀야 했다. 그 대답으로 할아버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윙크를 해주셨다. 나중에는 한국어가 궁금하셨는지 한국어로 adios(스페인어로 bye라는 뜻)를 알려달라고 하셨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면 된다고 말씀드리니, '안똥히 게떼요?' 라고 하면서 유쾌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너무 재밌고 좋았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콧수염이 멋있었던 두 할아버지를 순례길에서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다. 맑은 날씨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시원한 바람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바닥을 보니 순례자들이 길 위에서 구할 수 있는 소나무 잎과 솔방울로 만든 화살표가 있었다. 거세게 부는 바람에 흐트러지지 않게 다음 순례자들이 화살표 주변에 돌을 가져다 놓았고, 그렇게 점점 커진 화살표는 어느새 1미터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아무리 정신없이 걷는 순례자라도 이런 화살표는 꼭 한 번쯤 보게 되고, 화살표가 밟히지 않게 조심히 피해가게 된다.
마을을 지나고 밀밭이 나오기 직전에 짧은 숲길이 있었다. 맑은 날씨에 시원한 바람이 분다. 키 큰 소나무들과 잎이 넓은 활엽수의 수많은 나뭇잎이 자기들끼리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잎들이 정말 '솨아아' 라는 소리를 내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볼 수 있었는데, 그 순간은 마치 내가 그 나무들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무들의 시원한 바람 소리가 내 안에서 울려 퍼졌다.
정상처럼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이 행복한 순간이 조금이라도 더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이곳에 오래 있게 되었다. 따뜻하게 내려오는 햇살과 멀리서부터 포근하게 불어오는 선선한 봄날의 바람이 갈 길이 먼 나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곳에서 어제 준비한 과일을 간단히 먹고, 눈을 감고 새소리와 바람소리, 나무 소리에 한참을 귀 기울인 뒤 다시 출발할 준비를 했다.
구름이 있어 좋았던 날이다. 과거의 누군가는 한참 더울 때 이곳을 지나갔는지, 돌멩이로 ‘덥다’고 쓰인 단어가 바닥에 있었다. 아마 지독히도 더웠던 용서의 언덕을 올랐던 날 그 누군가는 이곳을 지나간 게 아닐까. 푸드 트럭을 지나 성당이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성당의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 보니 한 쪽 구석에 소중히 놓인 물건이 있었다. 뭔가 중요한 거라서 지켜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조금씩 더워지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면서, 너무나도 예쁜 이 길을 지나 나무로 가득 찬 숲 속에서 나 혼자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길 위에서 혼자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인 게 분명했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과 맞닿은 나무들이 경이롭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보며 길을 걸어간다.
사실 나는 내 존재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내 의견은 있었지만 주관은 불분명했고, 사랑받았지만 사랑하는 법을 몰랐으며, 나를 내보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하루하루를 지내왔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내 존재가 세상에 받아들여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시간과 공간 속에 나라는 한 순례자가 걸어가며 만들어 낸 흔적은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었다.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새소리와,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며 만들어진 소리는 나만 듣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이 순간의 새소리와 바람소리는 하나의 존재로 내게 기억되어졌다. 반대로 그들도 지금의 나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이 길 위에 존재하며 나를 기억하는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렇게 인정받은 내 존재는 길 위에 새겨져 '순례자'라는 그룹에 나를 포함시키게 되었다. 어떤 이유든 순례길을 걷는 모두는 순례자가 된다. 나는 지금 내 길을 걷는 한 명의 순례자다. 누군가의 가족이나 동료, 친구가 아닌 나는, 그저 나인 채로 이 길을 걸어온 것이다. 나는 걸음으로서 이 길 위에 받아들여졌고, 나를 둘러싼 세상이 내게 새겨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세상은 온전한 나를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였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누군가가 정해놓은 가치가 아닌 그저 나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세상에 받아들여진 기분이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뼈에 사무치게 행복했다. 순간을 담아내는 수많은 말들 중에 행복하다는 말 이외에 어떤 단어가 오늘에 더 적절한지 잘 모르겠다. 내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외칠 수 있는 것 또한 행복했다. 특히 아헤스로 가는 숲길이 너무 예뻤는데, 소나무 숲길을 지나 아헤스가 보이는 산중턱에 멈춰 서서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과 닿을 것처럼 사뿐히 내려앉은 낮은 하늘이 나의 길과 겹쳐져 보이는 것, 자유로이 풀을 뜯는 소, 따뜻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부는 하늘, 아무도 없는 이 길에 오로지 나만 있었던 그 순간.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고 바람소리, 스틱 소리로 박자를 맞춰가며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었던 그 순간. 잎이 큰 나무가 바람에 따라 휘날리는 것도, 저 멀리 작은 스페인 마을이 보여 다른 나라에 온 걸 실감하게 해주는 것도, 심지어 내 어깨에 놓인 무거운 짐조차도.
날씨, 무게, 기분, 사람들, 스페인어, 경치 그 모든 게 너무 행복해서, 지금 이 순간의 행복한 시간이 흘러간다는 게 슬플 정도였다.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축복하고, 응원하며,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아헤스(Ages)를 지나 아타푸에르카(Atapuerca)에 도착했다. 산티아고까지 518km 남았다는 걸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아침 출발시간이 늦었기 때문일까, 걸으면서 행복했던 순간을 길게 이어가고 싶어 일부러 천천히 걸었기 때문일까. 간단히 저녁을 해 먹고 오늘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한 뒤 일찍 잠에 들었다. 오늘은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