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차. 순례길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걷나요?

by 양송이타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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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jpg 프로미스타의 아침


프로미스타(Fromista)에서 시작하는 오늘은 아침부터 꽤 더운 것 같다. 출발시간이 약간 늦은 편이라 그런지 같은 시간에 출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며칠 동안 하루에 몇 번씩이나 우연히 마주치던 석재오빠도 같은 시간에 함께 출발했다. 37km를 걸어야 해서 짐을 미리 보내놓았기 때문일까, 내 걸음 속도가 오늘따라 유난히 빨라 많은 순례자들을 뒤로하며 걸을 수 있었다. 요즘 들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면서 발걸음도 덩달아 신이 나는 게 꼭 순례길을 즐길 수 있게 된 것만 같았다.


여느 때와 같이 아침을 먹으러 마을에 있는 카페에 들렸다. 바퀴벌레 약을 친 듯, 마을 곳곳의 건물 벽에 바퀴벌레가 죽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 탓일 거라고 믿고 애써 외면했다. 그동안 각종 벌레에 면역이 생긴 이유도 있었겠지만, 지금 바퀴벌레 따위의 이유로 아침을 먹지 않으면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카페가 또 언제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였는지 석재오빠도 카페에 들어왔다.


레온에 일찍 도착해서 푹 쉬기 위해 일정을 짜던 중, 석재오빠와 레온에 도착하는 날짜가 비슷해서 대략적인 일정만을 공유하게 되었다. 오늘 37km를 간 다음 날부터의 일정에 대해 A안과 B안을 나누어 생각해보는 거였는데, 사실 계획이 지켜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일정이 크게 의미가 없는 건 나도 오빠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막상 이렇게 정해놓아도 동행으로 같이 걷는 건 아닌 데다, 컨디션에 따라 각자 일정이 엇갈리면 앞으로 서로를 못 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이 한여름 스페인 무더위에서 따뜻한 커피만 줄곧 마셔왔다. 대부분의 카페에 메뉴판이 없었고, 메뉴판이 있어도 아메리카노와 라떼 정도만 적혀 있는데다가 직원과 영어로 소통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프라푸치노 같은 얼음이 든 음료는 전혀 본 적이 없어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기 위해선 콜라와 레몬에이드, 맥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콜라와 레몬에이드도 질리는 마당에 아침 7시부터 맥주를 마실 수는 없어서 고민하던 끝에 스페인어로 얼음이란 단어(hielo)를 찾아냈다. 한국에서 팔던 테이크아웃 컵에 담긴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순 없더라도, 에스프레소에 얼음과 물을 넣어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마시겠다는데 뭐라 할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만큼 이 무더위에 아이스 음료가 간절했던 나는 에스프레소와 얼음, 그리고 물을 사기로 마음먹었고, 젊은 카페 사장님께 가서 정중하게, 또박또박 여쭤보았다.


카페 사장님 : hola. (어서오세요)

나 : hola, buenos dias.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카페 사장님 ; buenos dias. (좋은 아침이에요)

나 : umm... uno espresso y una agua, por favor (저..... 에스프레소 한 잔이랑 물 주시구요..)

y.. puedo comprar los hielos en la taza....? (근데... 컵에 얼음 조금 담은 거 살 수 있을까요..?)


이게 뭐 문법이 맞고 이런 건 더 이상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아는 단어들을 어떻게든 조합해서 얼음 동동 떠다니는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만이 남아있을 뿐. 또박또박 한 단어씩 말하던 나를 보고 아빠미소를 지으시던 사장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카페 사장님 : (웃으며)cuanto hielos? (얼음 몇 개 드릴까요?)

나 : um.. umm........ dos, no no cinco!! cinco hielos, por favor!!!!!! (어... 두 개... 아니 아니 다섯 개!! 다섯 개 주세요!!!!)


04.jpg 스페인에 온 지 16일만에 처음 마시는 아이스 커피


영광의 순간이었다. 머릿속에 glory라는 단어가 울려 펴졌다. 드디어 나는 43도가 넘는 무더위에 따뜻한 커피가 아닌 아이스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처음 순례길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나를 보고 석재오빠도 ‘same menu!’를 외치며 커피를 주문했고, 그때부터 우리는 순례길에서 마실 수 있는 음료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되었다. 한여름의 아이스 메리카노라니.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영광이 담긴 빈 커피잔과 크루아상을 담았던 접시를 카운터에 반납하고, 이 카페의 세요(도장)를 크레덴시알(순례자여권)에 찍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야 승은아 빨리 와봐 빨리!!' 라고 석재오빠가 날 향해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뛰쳐나가 보니 세상에 어디서 날아온 건지 거위들이 카페 정원에서 놀고 있었다. 가만 보니 카페 사장님 부부는 카페 정원을 전시장처럼 가꿔놓았었는데, 잔디를 정리하고 미술품들을 예쁘게 진열해두었었다. 거위도 그걸 아는지 미술품들 근처에는 가지도 않고 카페 입구에서만 서성거렸다. 카페 사장님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던 우리에게 거위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위험하다며 조금 떨어지라고 하신 걸 보니, 아마 카페에 사장님들을 보러 자주 찾아오던 거위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를 나와 오늘도 카페인으로, 무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힘으로 열심히 달려 본다. 순례길에 몇 개 남아 있다는 템플기사단의 성당을 지났다. 호리병을 들고 걸어가는 듯한 과거의 순례자 동상이 보인다. 예전의 순례자들은 저 호리병에 술을 담았을까 물을 담았을까? 요즘 순례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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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빠져나와 화살표를 따라가니 까리온(Carrion de los condes)이 6km 남았다는 걸 알려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 말은 즉 이 구름 한 점 없는 땡볕을 1시간이상 더 걸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심심하다 못해 그림자 셀카를 찍어가며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까리온이 가까워져 있었다. 한참 전에 헤어진 석재오빠가 저 멀리 보였다. 아마 이 곳에서 쉬었다가는 거겠지. 우리는 은행에 가서 100유로짜리를 소액권으로 바꿔왔다. 근처에서 밥도 간단히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순례자들이 까리온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 일정을 준비한다. 그다음 코스가 어떤 마을이나 바, 심지어 작은 그늘조차 없이 17km 동안 쭉 이어지는 길이라 무조건 한 번에 17km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쉴 곳도 없고 식수를 담을 수 있는 장소도 없어 물과 음식을 넉넉하게 챙겨야 했다. 이때 시간이 마침 12시를 지난 시간이어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을 보며 정말 가야 하는 건지 수백 번은 더 고민한 것 같다. 만약 내가 배낭을 미리 보내놓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기서 하루를 쉬었으리라 100%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치 순례길 첫째 날 피레네산맥을 넘을 때처럼 나는 일부러라도 미리 짐을 보내놓은 상태였고, 어찌 됐든 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오래 다닐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일단 카드빚부터 만드세요.'라고 대답을 하는 그림이 갑자기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해가 땅에서부터 타오르는 1시였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17km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한동안 나무들이 듬성듬성하게라도 보여서 생각보다는 걸을만한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단 하나의 그늘조차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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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는 계속 같은 풍경이라 뭐 사진을 찍거나 구경을 할 것도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같은 노래를 몇 십 번을 들었는지 기억도 잘 안날 때쯤, 내 목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던 석재오빠가 오른 쪽으로 가자고 손짓을 보내왔다. 가까이 가 보니 예전에 이 곳을 지난 누군가가 간이벤치를 만들어 놓은 흔적이 보였다. 우리 외에도 길에서 종종 보았던 연응씨와 그의 동행, 그리고 다른 외국인 아저씨도 함께 있었다. 뭐라 할 말도 없이 약 2시간가량을 지옥 더위 속에서 걸어온 우리 모두는 앉자마자 그저 헛웃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심지어 석재 오빠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집어 들고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내가 진짜 욕을 잘 안 하는데 에라이 #$!@'라고 할 정도였다.


기록적인 더위를 자랑하는 2017년 여름의 스페인 내륙에 펼쳐지는 긴 메세타 평원은 정말이지 이런 곳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늘이 없어 고개를 들면 타오르는 햇빛에 얼굴과 피부가 따가웠고, 정면을 바라보니 땅에 반사된 빛이 눈을 찌르는 데다, 바닥을 보고 걸으면 지열이 올라와 얼굴이 후끈거렸다. 계속해서 똑같은 풍경이 이어지는 이 구간을 걸을 때 나는 발목이 드러나는 9부 냉장고 바지를 입고 있었다. 선크림 없이 노출된 발목 주변이 햇빛에 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걷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발목까지라도 덮는 긴 바지와 손목까지 내려오는 긴 셔츠가 없었더라면 피부가 타는 게 문제가 아니라 피부가 익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한여름의 순례길이었다.


07.jpg 어제는 예뻤던 밀밭. 생각해보니 햇빛아래에서 자라는 구나 얘네들은
14.jpg 그나마 있는 그늘조차 길을 향해 나있지 않았다.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야 드디어 칼사디야 데 라 께싸(Calzadilla de la cueza)에 도착했다. 길고 길었던 37km를 버텨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구간인 17km는 정말 힘들었다. 사실 37km를 하루만에 내가 걸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었는데, 그저 걸어지니 걸었던 것 같다. 예전에 책에서 읽은 제주 방언인 '살암시민 살아진다.'라는 말이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알베르게에 체크인하고 짐을 푼 뒤 샤워와 빨랫감을 처리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를 하러 1층에 내려왔다. 근처에 식당이 따로 없었던 터라 알베르게 1층의 자판기에서 뽑은 컵라면을 먹기로 했다. 한국을 좋아하는 친절한 호스피탈레로가 식당에 잠시 들르는가 싶더니, '상그리아 한 잔 할래?' 라고 말을 걸어왔다. 그는 영어를 전혀 못 했으며 스페인어와 바디랭귀지로 우리와 소통하고자 했다. 적당히 눈치껏 알아들은 우리는 '네 감사합니다!!'하고 샹그리아를 기다렸다. 그는 어디론가 들어가더니 갑자기 유리병을 꺼내왔고, 자신이 만든 샹그리아라며 마시는 법을 직접 알려주고 싶어 했다. 일반적으로 컵에 따라 마시는 게 아니라 유리병을 들고 입으로 바로 부어 마시면 된다고 한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시범을 보여주었고, 우리들이 마시는 걸 서로 동영상을 찍어주라는 말을 하고는 로비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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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석재오빠는 하루를 마무리하러 올라갔고, 나는 식당에 남아 일기를 쓰고 있다. 이전 마을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이 알베르게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알베르게 식당 안에서는 와이파이가 굉장히 잘 터졌고, 시설도 깨끗한 편이어서 37km의 피곤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중요한 사진과 동영상들을 백업하고 있는데 호스피탈레로가 지나가다가 잠시 식당에 들렀다. 내가 가져온 블루투스 키보드를 몇 번 구경하다 어디 또 나가는가 싶더니, 과일바구니를 들고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다. 쿠키와 과일, 빵들이 담긴 이 바구니 한 쪽 끝에는 작은 저금통이 있었고, 내일 아침에 배가 고프면 원하는 만큼 도나티보(donativo, 기부)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가라고 했다. 먹을 것을 파는 가게가 몇 없어서 식사하기도 마땅치 않았던 이 마을에서, 우리를 걱정해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던 호스피탈레로가 정말 고마웠다.




오늘은 순례길 전체 일정에서도 가장 긴 거리를 걸었다. 37km 중에서도 쉬지 않고 걸은 마지막 17km 구간에서 혼자 3시간 넘게 연이어 걸을 때 순례길 가이드북에서 봤던 '고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재수할 때 처음 알게 된 고독이라는 단어의 뜻. 그 안에 숨어있는 혼자라는 단어. 혼자 있을 때야 말로 간절함의 끝에서 고독이 스며나와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게 아닐까. 순례길을 걷는 지금도 과거의 그 때만큼이나 간절함이 있었기에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걸까.


이제 총 800km가 넘는 구간 중에 약 1/2이 되는 400km대로 접어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400km 가량을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해왔을까. 그저 걷기에 급급했던 건 아닐까. 하루에 6시간 정도를 걸으면 사실 6시간 내내 심각하고 다양한 생각들로 가득할 것 같지만, 막상 4시간은 '오늘 뭐 먹지.', '어디서 잘까.' 이런 생각을 하고, 1시간은 '아까 먹은 거 맛있었다.', '오늘 좀 덥네.',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30분은 멍 때리고 30분은 정말 심각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레온에 도착하게 되면 정확히 반을 지난 거라고 한다.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던 순례길에서 나만의 힐링데이는 레온에서의 하루로 정했다. 그래서 어플로 미리 호스텔의 싱글룸을 예약해뒀고, 혼자 편하게 쉬면서 지금까지의 400km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400km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오늘도 항상 행복하고, 또 행복하고, 그리고 행복한 하루였다.


11.jpg 정신놓고 걸었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