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차. 수도원 알베르게에서 처음으로 무서웠던 경험

by 양송이타파스
01.JPG


02.jpg 깔사디야 데 라 께사에서의 아침


오늘도 역시 아침 해가 다 뜨기도 전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언제나처럼 아침에 일어나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주변을 둘러보니 같은 시간에 출발했던 석재오빠가 없어져 있었다. 서로 대화를 하며 걷는 게 아닌 데다, 하나의 길을 걷기 때문에 속도 차이로 그와 멀어지는 건 당연했다.


보통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카페의 오픈 시간이 7~8시정도였기 때문에, 5~6시에 나오면 2시간가량을 공복으로 걸어야 한다. 길어봤자 5시간정도 자고 일어나서 걷는 아침이어서 사실상 눈을 반쯤 감고 걷는데 거짓말 같겠지만 약간 꿈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계속 눈을 감고 걷는 건 아니고 한 번씩 눈 떠서 화살표를 확인하긴 한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작은 마을이 나왔다. 아침 일찍 열려있는 카페에서 석재오빠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나도 에스프레소와 얼음, 그리고 바나나를 주문해 아침을 먹었다. 오늘은 하늘이 맑아서 좋은 날이다. 길가에 예쁘게 핀 프리지아도 보고 갈림길도 지나면서 계속해서 걸어갔다. 차가 다니는 길 바로 옆에 해바라기 밭이 있는데 꽃이 햇빛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03.jpg 7월에 볼 수 있는 해바라기밭


길을 걸으면서 좋았던 것 중 하나는, 까미노 위의 사람들이 얼마나 까미노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이면 상업화가 될 만도 한데, 산티아고로 가는 여러 갈래 길 중에서 가장 상업화 된 길이 내가 걷고 있는 프랑스길(Camino frances)이라고 한다. 하지만 직접 걸어본 느낌으로는, 상업화는커녕 오히려 걷기에 불편할 정도였다. 수풀이 우거져있어서 손으로 헤치고 가야 하는 곳도 꽤 많이 있었다. 도시 외곽에 길목을 방해하는 나무들도 많은 편이었는데 키가 작은 나조차 머리에 나뭇잎들이 닿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 나무를 잘라 내거나 곁가지를 정리하지 않고 사람들이 오히려 그 나무를 피해 다녔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에서는 길이 좁다고 길을 크게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그 좁은 길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프랑스길 위에 있는 도시나 마을의 식료품점 물가가 대도시에 비해 비싼 것도 아니었다. 과일과 고기는 대도시와 똑같이 저렴했다. 관광지라면 보통 일반 도시보다 최소 1.5배는 비싸야 하고, 오지에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 비싼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순례길의 물가는 그렇지 않았다. 어제 묵었던 공립 알베르게도 시설이 꽤 좋은 편에 속했었지만 고작 5유로로 이용할 수 있었다. 오히려 도시의 호스텔이 시설이 더 안 좋은 경우가 있으면서도 훨씬 비싼 가격을 부르는 곳이 많았다. 까미노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나눠주기 위해 노력하는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온 까미노는 왜 그렇게 사랑받는 걸까. 길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걸까. 나도 나의 까미노를, 나의 삶을, 나의 존재를, 그 자체를 사랑할 수 있게 될까.


04.jpg




한참을 걷다 잠시 쉬기 위해 카페에 들렀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카페에서 연응씨와 석재오빠를 또다시 만났다. 예전에 보던 순례자들 중에 지금까지 꾸준히 보고 있는 건 5명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하루에 몇 십 명 넘게 인사를 하지만 부르고스~레온의 메세타평원 구간에서 점점 사람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가장 늦게 도착한 나를 빼고 다른 분들은 식사를 마친 상태여서 먼저 떠났고, 나는 맛없는 빵으로 그럭저럭 배를 채우고 일어났다. 카페를 나가려고 하자마자 문 앞에 자전거 수십 대가 쌩하니 지나갔다. 산티아고로 가는 여러 가지 방법 중 두 번째로 많이 이용하는 게 자전거라고 들었는데, 이 마을이 자전거가 지나는 마을 중 하나였나 보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사하군으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국도를 따라 도시로 바로 들어가는 방법이고, 하나는 국도에서 시골길로 우회해 순례길의 절반에 도착했다는 상징인 석조물을 지나는 방법이다. 오늘은 무더위가 이어지긴 했지만 전체 거리 25km면 최근 며칠에 비해서는 짧은 편이었고, 까미노 그 자체를 즐기고 싶어서 우회 루트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멋있게 얘기했다면 좋았을 텐데, 사실 쉽게 선택한 건 아니고 아까 점심 먹을 때 석재오빠가 '야 그래도 순례길은 역시 전통 길로 가야지!!' 하면서 웃으며 말했던 게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국도를 통한 루트는 까미노필그림 어플에서 'new route'라고 적혀있었고, 우회 루트는 'original route'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아무리 석재오빠가 그렇게 말 했어도 이 무더위에 그늘도 없이 최소 2, 3km를 더 가야 하는 우회 루트를 꼭 선택해야 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우회 루트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 순간 어떤 외국인 부부가 내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큰 배낭을 메고 있었지만 지친 기색 없이 시골길을 즐기며 천천히 걸어갔고, 나도 왠지 그들을 따라가고 싶어졌다. 행복해 보이는 저 부부를 따라가면 덩달아 나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시골길을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다 보니 어느새 순례길의 반을 알리는 석조물 앞에 오게 되었다. 한국은 어마어마한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오늘, 무더위가 이어지는 스페인의 여름 한복판에서 나는 정확히 순례길의 1/2에 도착했다.


(사족) 까미노는 당연히 전통길이지!!라고 말했던 석재오빠가 나중에는 비교적 거리가 짧은 국도길만 고집했다. 원래 순례길은 길을 만들어 가는 거라며 단 100m도 우회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사하군(Sahagun)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알베르게를 찾는 것이었다. 공립알베르게에 체크인하려 했는데 지도를 보니 바로 뒤에 장례식장이 있었고 평소 꿈에 영향을 많이 받아 왔던 터라 악몽을 꿀 까봐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보았다. 처음에 생장에서 나눠준 알베르게 리스트를 보면 몇 가지 표시가 있는데, M/R/P라고 구분이 되어있다. M은 Municipal, 공립 알베르게의 약자고 R은 Albergue Parroquial,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 그리고 P는 Private Hostel, 사립 알베르게라는 뜻이다. 알베르게가 두 개뿐이었던 사하군에서 공립알베르게를 피했으니, 내게 남은 건 R, 즉 수도원 알베르게 뿐이었다. 수도원에서는 수녀님들이 순례자들을 위해 별관에 작게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수도원에서는 수녀님들이 공부하시는 곳과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06.jpg 수도원 알베르게 외관


그렇게 유명한 곳도 아니거니와 대부분은 사하군에서 공립알베르게를 찾기 때문인지 화장실이 있는 4인 1실을 혼자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 세상에 온 것 같아 너무 기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50대 중반의 외국인 아저씨가 들어왔다. 침대와 침대 사이 간격이 1m 남짓이었을 뿐인데 4인 1실에 나와 정체모를 외국인 아저씨 둘 뿐이라니.


게다가 이 아저씨는 계속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자 혼자 산티아고에 가는 것에 대한 위험이나 비상 대책 등을 많이 검색해보고 왔지만,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지금까지 지내왔던 알베르게에서는 적어도 한 공간에 30명이상 같이 쓰게 되어있었고, 많은 곳은 200명이 넘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화장실이 방 안에 있는 4인 1실에, 중년 외국인 아저씨와 나 둘 뿐이라니. 이걸 어찌해야 하나.


배가 고파 일단 밥을 먹고 생각하기로 했다. 너무 더워서인지 다들 그늘 아래로 지나다녔다. 아까 연락이 되었던 석재오빠와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석재오빠는 공립알베르게에 잔다고 했는데 그곳은 여러 명이 함께 자는 일반적인 알베르게라고 한다. 체크인 했던 수도원 알베르게를 환불한 뒤 공립으로 옮길까 고민도 했었지만, 영어를 하나도 못 하는 수도원의 수녀님이 생각나 그냥 그대로 있기로 했다. 외국인 아저씨가 혼잣말하면 나도 혼잣말해야지 하는 의지를 강력하게 불태우면서 저녁을 먹었다. 디저트로 나온 푸딩 맛있더라.


우리나라에 홈플러스나 이마트가 곳곳에 있듯이, 스페인 순례길 곳곳에는 Dia라는 대형마트가 있다. Dia 외에도 여러 브랜드가 있지만 가장 흔하게 있는 마트는 Dia라는 마트다. 자체 브랜드 상품도 구비되어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자두 1kg 2천 원

멜론 1/2통 2천 원

삼겹살 2근 1만 원

커피 1~2천 원


특히나 고기류와 과일이 저렴하고 맛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대형마트를 보면 꼭 들리게 되었다. 오늘도 설렌 마음을 안고 Dia에 들려 물과 과일, 수프를 사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평소 500ml의 물 한 병으로 10km를 걸어가던 나였지만 오늘은 Dia에서 싼 값에 물 두 병을 사서 신나게 흔들고 다녔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는데 뭔가 이상한 맛이 났다. 포장지를 자세히 보니 Gaseosa라고 적혀있었다. 탄산음료조차 잘 안 마시는 내가, 심지어 향료가 들어간 탄산수를 두 병이나 사 왔던 것이다. 어떤 브랜드의 물을 고를까 고민하다가 그냥 예쁜 병에 담긴 걸 사야지하며 골랐던 게 탄산수였다니. 게다가 과일이 맛이 없을 수 없는 이 나라에서 자두와 납작 복숭아조차 맛이 없는 걸 골라왔다.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며 샀던 수프의 뒷면을 보니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만 조리법이 적혀있었다. 오늘 장은 완전 꽝이었다.




그렇게 상심하는 와중에 옆 침대를 사용하는 외국인 아저씨가 방에 들어왔다. 보통은 순례자끼리 눈을 마주치며 hola, buen camino, buenos dias 등 간단한 인사를 전하기 마련인데, 이 아저씨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며 침대를 정리할 뿐이었다. 모든 두려움은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불안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며 뭔가 이야깃거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맛이 괜찮았던 자두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거다.


나 : 저기.. 아니 hola, bunas tardes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예요!)

혼잣말하는 아저씨 :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혼잣말을 함)

나 : ... (시무룩)


그래 어차피 세상은 부딪히고 봐야 하는 거겠지. 나도 내 언어로 혼잣말이나 해야겠다.


나 : 아니 내가 인사를 했는데 받아주지도 않고.. 이 아저씨 이상한 것 같은데 오늘따라 왜 4인 1실에다가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야 정말.. (한국어로 혼잣말 하는 중)

혼잣말하는 아저씨 : (힐끔)


날 쳐다본 것 같다. 지금이 기회다.


나 : 어 아저씨 아니 HOLA!! (안녕하세요)

혼잣말하는 아저씨 : hola (네 안녕하세요)

나 : Do you speak english? I'd like to give you this fruit.

(영어 할 줄 아세요? 이거 드실래요?)

혼잣말하는 아저씨 : Thank you. Is there any supermarket?

(고마워요, 슈퍼마켓이 있었어요?)

나 : It's near from here, But I guess It's closed now. Anyway, where are you from???

(네 가까워요! 근데 영업 끝났을 거예요, 근데 아저씨는 어디서 오셨어요???)


작고 낮은 목소리를 가진 이 아저씨와 그렇게 약 10여 분 동안 대화를 이어나갔는데, 유럽 어딘가에서 온 이 분의 정체는 교사였다. 방학이라 까미노를 올 수 있었고, 매 방학마다 까미노에 들린다고 했다. 아주 사교적이거나 영어 발음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소통을 하고 이름을 물어보고 나니 두려움의 정체가 밝혀진 기분이었다. 다행히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발목 부근이 어째 많이 탔다 했더니 역시나 화상을 입었다. 어제 마지막 17km에서 발목을 내놓고 걸었던 게 영향이 있었나 보다. 피부 유형에 따라 '자외선에 몇 분 이상 노출되면 화상을 입는지'를 자외선 지수와 강도로 나타낸 자료가 있었는데, 자외선 지수 9+의 경우 햇빛에 민감한 피부라면 30분만 넘겨도 화상을 입는다고 한다. 참고로 어제 자외선 지수는 9가 넘었었고 발목이 햇빛에 노출된 시간은 약 240분가량이었다. 샤워를 하는데 따끔따끔한 느낌이 들어 한국에서 가져온 포포크림과 바디로션을 발라줬다. 한동안 긴 등산바지만 입어야겠다.


08.png
07.jpg 너무 더워서 사람들이 그늘로 다닌다.


무더위에 배낭을 메고 25km를 걸어 사하군에 도착한 오늘. 이제 하루를 마무리 할 시간이 되었다. 내일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일어나서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기왕 그렇게 걸을 거 해가 뜨기 전 깜깜할 때 한 번 걸어보고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 걸으며 보게 되는 순례길의 별은 그렇게 예쁘게 빛난다고 하더라. 하지만 오늘은 여러모로 무서운 느낌을 받아서인지 새벽에 혼자 걷는 건 아무래도 조금 부담스러울 것 같다. 석재오빠한테 연락해서 혹시 내일 일찍 출발할 생각은 없는지 물어봐야겠다.


0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