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차. 오늘은 도시의 불빛조차 등지게 되었다.

by 양송이타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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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jpg 사하군의 새벽 5시


어제의 지독했던 더위를 피하기 위해 오늘은 새벽 5시에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새벽녘이었지만 서둘러 일어나 짐을 챙겼다. 알베르게 입구의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문 중앙에 cerrado(closed, 닫혀있음)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수녀님들이 새벽 기도를 올리는데 소음에 방해받지 않고 집중하기 위해서7시 이전에는 문을 닫아놓는 것이었다. 어제 왜 이 공지를 읽지 못했을까. 밖에 다른 알베르게에서 먼저 출발한 석재오빠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석재오빠는 어젯밤에 오늘 아침 내가 연락이 없으면 늦잠을 자는 걸로 이해하고 먼저 출발한다고 했다. 나는 7시까지 여기 갇혀있어야만 하는 건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때마침 문 안쪽에 작은 버튼이 있는 걸 발견했고, 최대한 소음이 나지 않게끔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 빛나는 별빛은 사실이었다. 길을 밝혀 줄 정도로 환하게 빛나진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쉽게 보지 못한 작은 별들이 무수히 많이 있었고,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도시의 불빛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사하군에서 나오는 길은 국도가 이어진 길이어서 간혹 자동차나 트럭이 지나가곤 했다. 가끔 화살표를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의 손전등을 켤 때와 자동차에서 나오는 불빛 외에는 그 어떤 가로등이나 불빛도 없는 아주 깜깜한 밤이었다. 동쪽의 생장에서 출발해 서쪽의 산티아고까지 걷는 순례자들은 항상 빛을 등지고 걸어야 하는데, 오늘은 도시의 불빛조차 등지고 걷게 되었다. 갑자기 어디서 야생동물이 튀어나온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환경에 야심한 밤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한 걸음 앞에서 묵묵히 걸어가는 석재오빠가 있었기 때문일까. 사실 오빠는 나보다 걸음이 훨씬 더 빠르기 때문에, 이렇게 일찍 출발하지 않아도 12시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더 늦잠을 자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오빠한테 무리한 부탁을 한 건 아닌가 잠시 고민했지만, 이 분의 성격상 굳이 무리한 일을 하실 것 같지는 않아 생각을 흘려보내기로 했다.


평소 아침에 혼자 걷게 되면 눈을 반쯤 감고 길을 헤매기 일쑤였다. 화살표를 찾기 위해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멈춰 서서 구글 지도를 켜는 게 일상이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2시간가량 걸으면서 멈춘 적이 거의 없었다. 앞에서 말없이 걷고 있는 석재오빠가 동물같은 감각으로 길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빠르게 걷고 있는데 혹시나 이 깜깜한 밤에 오빠를 놓칠까 싶어 걸음 속도를 늦추지 못 했다. 평소 내 걸음보다 훨씬 빠르게 걸어서 가끔은 숨이 찰 정도였지만, 나 때문에 일찍 나와 준 오빠에게 쉬다 가자고 말을 할 수가 없어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어둠과 침묵 속에서 걷다 보니 벌써 10km가 지나 마을이 나왔다. 하지만 이 시간에 열린 카페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잠시 쉬었다가 다음 마을로 이동하기로 했다.


04.jpg 이 시간에 카페가 열려있을리 없었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게 익숙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든든함을 느꼈던 것 같다. 한 걸음의 간격을 두고 2시간 동안 함께 걸으면서 세 마디 이상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전혀 어색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깜깜했던 밤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주변 건물과 하늘의 색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오빠가 조금 쉬어야겠다며 나를 먼저 보냈고, 나는 다시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길을 걷다 보면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기 일쑤였는데, 어제 뭘 먹었는지 떠올리다가 저녁을 먹으며 얘기했던 게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어제 석재오빠가 '어깨가 아프다'라고 얘기를 했을 때 '저는 발이 아파요'라고 대답했다. 이 얼마나 대화의 흐름을 단칼에 끊어버리는 무지한 행동이었던가. 어깨가 아프다는 사람에게 어깨가 어떻게 아픈지, 왜 아픈지를 물어보는 게 대화의 시작이고 경청의 기본인데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좀 더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들을 줄 알았으면 좋겠다. 내 이야기를 조금 줄이고 내 생각을 한 템포 늦게 말할 줄 아는 미덕을 갖추고 싶다.


날이 서서히 밝아올 때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염없이 길을 가다 보면 '어디쯤 왔지? 얼마나 남았지?' 라는 생각조차 안 들 때가 있다. 어느 정도 지나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면서 '그냥 길이구나' 하는 느낌. 걸어야 하니까 걷고 있는 그런 느낌. 그러다 보면 어느새 4, 5km쯤 지난 걸 알 수 있었다. 며칠 전에는 그렇게 17km를 한 번에 걸었었고, 오늘은 13km를 쉬지 않고 걸어왔다.


05.jpg 시간이 지나 햇빛이 물들었다.


햇빛이 물드는 마을을 지나 논밭을 헤치며 걷고 있다. 다시 혼자가 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뒤에 오던 석재오빠가 나를 추월해 지나갔고 나는 한참 뒤에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몇 분을 더 걸었는데 저 멀리 석재오빠가 간식을 먹기 위해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마침 갈림길 앞이어서 어느 방향이 맞는 건지 물어봤다. 석재오빠는 왼쪽 방향을 가리켰고, 간식을 드시고 천천히 오라는 말과 함께 나는 왼쪽으로 떠났다. 아무도 없는 밭을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도중에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서 안 좋은 일로 연락이 왔다. 급한 일이었기에 통화를 하며 정신없이 걷고 있었다. 그 순간 뒤에서 트랙터 하나가 탈탈 거리며 내게 천천히 다가온다.


트랙터 부부 : hey peregrina~~

나 : ??

트랙터 부부 : It's not, not! no camino! no!

나 : ?????

트랙터 부부 : (오른 편을 가리키며) that!! that!!

나 : (알아챈 듯) Muchas gracias!!!


길을 잃었었나 보다. 저 멀리서 잘못된 길을 가는 나를 보고 트랙터를 끌고 여기까지 와주신 부부가 너무 고마웠다. 하얀 건물 주변에 있는 나무를 따라 걸어야 했는데, 나는 밀밭을 헤치며 엉뚱한 길을 걷고 있었다. 왠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지나치게 논밭같은 느낌이었고, 오른쪽에는 옥수수가 왼쪽에는 밀이 무성하게 자라서 자꾸 나를 찌른다 했다. 원래 가야했던 길로 갈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없어 보여서 논밭 사이에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 풀을 헤치며 길을 만들어 가기로 했다. 건물 근처에 도착해 제대로 된 길 위에 올라서니 저 멀리서 석재오빠가 웃으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야 거기 길 아닌데 왜 거기로 갔어ㅋㅋㅋㅋㅋㅋ'




18km를 더 걸어 아침을 먹을 수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역시나 석재오빠가 먼저 도착해서 테라스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여기서 루비와 루비의 아빠인 메이슨을 다시 만났다. 수비리에서 헬모트와 루비, 메이슨 이렇게 총 4명의 합석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인연은 아직까지 이어져있었나 보다. 그때가 생각나 루비의 테이블에 합석을 했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아픈 곳은 없는지 서로를 살뜰히 챙기기에 바빴다. 루비는 중간에 한 번 점프를 했다고 한다. 일정이 조금 부족한 탓에 2~3번의 점프가 필수였는데, 길을 다 걷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쉽다고 했다. 미국에 있을 때 산길을 많이 다녔는데도 지금 이 메세타평원 구간은 평지라 더욱 힘든 느낌이라고 했다. 그래도 사람들을 만나고 길을 걷는게 재밌어서 좋다고 했다. 건강한 루비와 메이슨을 보니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너무 기뻤고, 헬모트를 봤냐고 묻길래 마지막으로 내가 만난 날짜를 말해 주었다. 다음에 또 봤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루비와 메이슨을 떠나보냈다.


사하군에서 랠리에고스로 넘어오는 길 중에 작은 마을이 몇 군데 있었다. 그 중 이름 모를 어떤 마을에서는 순례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한글이 있었고 심지어 컵라면과 햇반도 팔고 있었다. 한국을 좋아하는 사장님 덕분인지 한국어 패치가 된 메뉴판이 깔끔하게 정리된 채 계산대 옆에 놓여있었다. 어떤 한국인의 도움이었는지 입간판에도 한글이 적혀 있었다. 음식들도 맛있어 보였는데 아침을 가볍게 먹으려고 들른 곳이라 바게트 외의 다른 음식을 먹지 못 한 게 아쉬웠다. 카페라떼를 주문하고 빵을 골랐다. 그 때 식사를 하고 있던 남자 손님이 갑자기 다가오더니 이 빵이 제일 맛있다며 추천해주었다.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후 음식을 받아 테라스로 나오니 사장님이 나오셔서 직접 만든 거라며 주스를 서비스로 가져다 주셨다. 루비와 메이슨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준, 그리고 맛있는 음식으로 기분을 좋게 해 준 이 카페와 마을에 감사했다. 즐거운 기분으로 아침을 먹고 다시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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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리에고스(Reliegos)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하기 조금 전 다시 만난 석재오빠와 알베르게 이야기를 하다가 같은 알베르게에 체크인하게 되었다. 예전에 수비리에서 봤던 한국인 모녀, 까미노를 즐기던 한국인 아저씨, 그리고 루비와 메이슨도 이 마을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루비와 메이슨은 마을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에 체크인했지만, 우리는 마을 끝에 있는 알베르게에 체크인해서 운이 좋으면 다음날 또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 레온에 일찍 도착하기 위해 오늘 30km 가량을 미리 걸었다. 랠리에고스에 도착하기 전에 있는 마을의 카페에서도 사장님이 한국을 너무 좋아하셨고, 지금 일기를 쓰고 있는 이 곳 알베르게 역시 한국을 좋아하는 호스피탈레로가 우리를 환하게 맞아주셨다. 게다가 이곳은 시설도 좋은 편에 속했는데, 벌레가 거의 없는 철제 침대에 깨끗한 1회용 시트가 깔려있었다. 두 개의 침대가 붙어있기도 했지만 사람이 적은 편이라 한 명이 더블베드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특히나 여긴 샤워시설이 너무 좋았는데, 깔끔하게 리모델링된 샤워실에 갈아입을 옷이나 귀중품을 놓아 둘 수 있는 나무 협탁이 있었다. 그동안의 알베르게는 협탁은커녕 1제곱미터 가량 되는 좁은 샤워실에 옷을 둘 공간이 아무 것도 없었고 문 위에 옷을 걸쳐놓아야 해서 샤워가 끝난 후에는 축축해진 옷을 입고 나와야 했다. 게다가 순례길을 걸으면서 계속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장애인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알베르게는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본 장애인 화장실이 있는 알베르게였다. 공립알베르게가 시설이 좋지 않다는 소문은 근거 없는 소문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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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장애인용 샤워실 겸 화장실 / (중간) 알베르게 내 공용식당 / (오) 알베르게 내 침대





샤워를 하는데 발목이 따끔거렸고 피부에 물이 닿으니 훨씬 더 따가웠다. 옷깃에 발목이 스치면 화끈거려 계속 크림을 발라줬는데도 호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손등과 턱 주변에도 작은 뾰루지가 생겼는데, 햇빛 때문에 생겨난 알레르기 반응 같았다. 수십 분 햇빛을 받을 경우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었나 보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 앞으로 남은 일정과 레온에서 인출할 유로를 계산해 봤다. 반 정도 지났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일정을 약 14일로 잡고, 하루에 30유로씩 쓴다고 가정하면 420유로가 필요하다. 여기서 대도시인 레온과 산티아고, 그리고 파리에 돌아가서 쓸 유로를 넉넉하게 계산하면 총 7~800유로쯤 될 것 같다. 하루에 30유로를 안 쓸 때가 많으니 600유로 정도 인출해 놓고 부족하면 카드를 사용해야겠다.


순례길을 매일 2~30km씩 걷다 보니 경비의 평균치가 있었다.

1. 알베르게 = 8~12 유로 내외

2. 아침 식사 = 5 유로(전날 준비하거나 카페에서 간단히)

3. 점심 = 5 유로(카페에서 빵과 커피)

4. 저녁 = 10유로(menu del peregrino 기준)

5. 간식 = 3유로(맥주나 콜라)

6. 동키서비스 = 3~10유로


알베르게의 경우 도나티보라는 기부제 알베르게에 간다면 자신에 상황에 맞게 내면 된다. 저녁은 장을 봐서 다 같이 해 먹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사 먹는 걸 기준으로 할 때 저 정도 경비가 소요됐다. 물론 이 외에도 대도시에서 사용하게 되는 추가 비용과 기념품, 혹은 간식들이 더 들 수 있고 저 같은 경우는 등산 스틱이나 기능성 티셔츠, 무릎 보호대의 지출도 따로 있었다. 세탁기나 건조기를 사용할 경우 각각 3유로씩 추가하면 되고, 여름이라면 건조기는 사용할 필요가 거의 없으니 세탁기만 사용해서 3유로로 해결할 수 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새벽 5시에 출발한 건 좋은 선택이었다. 비록 18km를 걸어야만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카페가 나왔지만, 루비를 다시 만난 데다 한국을 좋아하는 사장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샤워를 하면서 발목의 화상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깨끗한 시설의 알베르게와 친절한 호스피탈레로 할아버지 덕분에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기쁜 일들로 가득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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