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차. 당신의 쓸모없는 재능을 어필해주세요

by 양송이타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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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jpg 폰세바돈의 아침과 양


폰세바돈에서 철의 십자가로 가는 길에 보이는 별빛과 은하수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4시쯤 일어나 출발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4시에 일어나 보니 잔뜩 쌓인 안개와 구름 때문에 별빛은커녕 달도 잘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이 밝게 빛났던 야경으로 만족한 채 그대로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아침을 맛있게 먹은 뒤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하늘을 보는데, 누군가 붓으로 그린 것처럼 예쁘게 햇빛을 받고 있는 구름이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자기 꼬리에 흙이 묻은 걸 모르는 너구리가 지나가면서 꼬리 자국을 남긴 느낌이었다.


그 유명한 철의 십자가에 도착하니 순례자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있었다. 그동안 안 보였던 순례자가 여기에 다 있었나 보다. 철의 십자가를 지나 산을 올라가고 있는데 바람이 불어오더니, 어느새 나타난 구름들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구름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산을 올라가고 내려가고를 반복하는 와중에 산 중턱에 안개가 쌓인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구름이 내려온 것 같은 안개 속으로 나도 모르게 들어오게 된 것 같아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세 명의 유쾌한 스페인 여자분들이 내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 하셨다. 핸드폰을 건네고 사진을 부탁했다. 내게 뭔가를 물어보는 것 같은데 영어를 못 하셔서 바디랭귀지로만 의사소통을 했어야 했다. 이 분들 외에도 같이 걷던 친구는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는데, 아마 석재오빠를 말하는 것 같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말을 걸어 준 덕분에 산길을 재밌게 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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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십자가 이후로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이었다. 약간의 오르막이 있을 뿐, 1500m의 정상에서 500m에 있는 마을까지 쭉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걸어가야 했다. 피레네를 지나고 용서의 언덕을 내려갈 때처럼 무지막지한 내리막길이 눈앞에 펼쳐졌었는데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용서의 언덕에서는 처음 만난 산길이 무서웠고, 너무 더운 데다 온몸이 아파 반쯤은 정신을 놓고 내려왔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돌을 밟고 내려가야 내가 덜 아플지 알고 어떤 길을 택해야 무릎에 무리가 덜 갈지를 안다. 그리고 이 길에 끝이 있다는 것 또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짐을 보내놓고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한 뒤 무릎보호대와 스틱을 챙겨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이전과는 훨씬 달라진 내 모습이 좋다. 나중에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발을 보니 예전에 발톱이 빠질 정도로 아팠던 것과는 다르게 단 하나의 물집도 잡히지 않았다.


동화같이 예쁜 마을, 몰리나세카

약 20km를 걸어와 몰리나세카(molinaseca)라는 마을에 왔다.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예쁜 마을이다. 예쁜 건물들에 아슬아슬하게 장식된 꽃과 그림 같이 앉아있는 고양이를 봤다. 이미 몰리나세카에 도착해 쉬고 있던 석재오빠를 만나 맛있는 샐러드와 푸딩을 점심으로 먹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폰페라다로 가기 위해 다시 일어나 배낭을 멨다. 요즘 들어 계속 20km 내외만 걸어서 그런지 남은 7.6km를 걷는 게 너무 지루했다. 그래서 석재오빠에게 아무 이야기라도 좋으니 뭐라도 얘기해보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가진 쓸모 있는 재능이나 장점, 기억에 남는 음식,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 소재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문득,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건 어떻냐고 제안해 보았다. 그래서 나온 게 '최대한 쓸모없는 재능'을 어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쓸모없는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시작했다.


까꿍

각자 쓸모없는 재능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왜 쓸모없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했다. 석재오빠는 회를 잘 뜬다고 했다. 요리가 직업이 아니거나 생선을 직접 잡아먹는 게 아니고서는 어디서 회를 뜰 기회도 없기 때문에 쓸모없는 재능이었다. 나는 그림을 따라 그리는 걸 잘 한다고 했다. 나 역시 미술이 직업이 아닌 데다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는 거라 창작도 아니기 때문에 어디 가서 내세울 수 있는 재능이 아니었다. 석재오빠는 외상에 민감하지 않다고 했다. 적당히 다쳐도 크게 아프지 않아서 티가 안 난다고 했다. 나는 주변 사물이나 건물을 잘 기억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길치라서 별로 의미가 없는 재능이었다. 누가 더 쓸모 있냐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세상 속에서 쓸모없는 재능의 쓸모없음을 어필하는 건 색다른 느낌으로 재밌었다.








폰페라다(Ponferrada)에 도착했다. 순례길 중에서 꽤 큰 도시는 어떤 도시냐고 누가 묻는다면, 은행이 있거나 병원이 있는 도시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에겐 또 하나의 기준이 있었으니, 바로 버거킹의 유무였다. 기부제(donativo)였던 공립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짐을 풀어놓고 2km 넘게 떨어져 있는 버거킹에 가기 위해 선크림을 다시 발랐다.


버거킹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할까 고민했는데 막상 버스 노선을 찾는 것도 귀찮아져서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가끔 보이는 공용 자전거를 타려고 했지만 날이 너무 더워서 이용방법을 찾아 볼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두 발로 걸어서 도착한 버거킹은 대형 쇼핑몰 안에 있었다. 온갖 편의시설이 다 있는 곳이었는데 오랜만에 큰 건물과 편의시설을 보니 괜히 설렜다. 버거킹에 가서 세트메뉴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약 3주 만에 일회용 케첩과 감자튀김, 그리고 햄버거를 먹었다. 한국에서는 집 근처 5분 거리에 버거킹이 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이렇게까지 햄버거가 사랑스러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몸에 안 좋은 건 다 맛있다더니 정말인가보다.


햄버거를 다 먹고 밖에 나오니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이 햇빛을 뚫고 알베르게로 돌아갈 길이 막막했다. 택시를 탈까 수십 번 고민했지만, 이렇게 고민하는 시간에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오늘은 샤워를 두 번 해야 할 것 같다.


알베르게에 도착하기 전에 마트를 놓칠 수 없어서 잠시 들렀다가 먹을거리를 수북하게 안고 돌아왔다. 오늘은 산행을 했지만 그리 힘들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말을 걸어 준 다른 순례자들이 있었고, 내 생각에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웠던 건, 예쁜 풍경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난다는데 나는 아무도 생각나지 않더라. 그저 멍한 표정과 함께 나온 감탄사뿐이었다.


버거킹과 함께 한 행복한 하루가 짧게 지났다. 내일도 오늘처럼 아름다운 하루가 이어지길.


05.jpg 돌 옆에 돌을 이어 생긴 회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