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차. 언제나와 같은 일상에서 너는 너를 찾아냈을까

by 양송이타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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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jpg 팔라스 데 레이의 아침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ay)의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같은 알베르게에 있던 순례자들 중에서 내가 제일 늦게 나왔다. 이상하게 요즘들어 아침 잠이 늘어났고 일어나는 것도 귀찮아졌다. 알베르게에서 우니클라 우유를 마시고 나오긴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니 지나가다 보이는 카페에서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 멜리데를 지나 보엔테까지, 오늘은 21km만 걸으면 된다. 어디서 빵굽는 냄새가 난다 했는데 근처에 빵을 납품하는 빵트럭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빵을 팔기도 하는 이 트럭 앞에서 빵을 사먹을까 말까 고민했다. 아침을 먹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았고 빵이 너무 커서 도저히 혼자 다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지나칠까 했는데 앞서 간 순례자들이 우리에게 자신들이 산 빵을 조금 먹어보라며 권해주었다. 생각보다 맛이 없고 딱딱한 빵이었지만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맛없어서 준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의 목적지로 가기 전에 꼭 들려야 할 중간 목적지가 있었다. 멜리데(Melide)라는 마을로, 뽈뽀(Pulpo)라는 문어요리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멜리데 안에서도 손 꼽히는 뽈뽀레스토랑으로 갔다. 내가 여기를 얼마나 기대했냐면 오픈시간에 맞춰 도착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일부러 일정을 조절할 정도였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뽈뽀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문어숙회에 고춧가루가 뿌려진 느낌으로, 맛이 있긴 했지만 너무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오히려 예전에 로그로뇨에서 먹은 뽈뽀나 트리아카스테라에서 먹은 감바스 훨씬 더 맛있었다. 조금은 밋밋한 느낌의 문어요리에 아쉬움을 느끼고 일어날 때쯤 한스아저씨를 만났다.


한스아저씨는 어제 알베르게에서 인사를 나눈 세 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다. 아들과 함께 순례길을 걷고 있었는데, 학생처럼 보이는 20대 초반의 독일 여자아이와 함께 있었다. 여러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한스아저씨는 한국어에도 관심을 보였다.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석재오빠가 던진 이상한 농담에도 웃으며 반응해주던 유쾌한 아저씨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저녁을 먹으러 내려간 식당에서 문화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보통 가족끼리 여행을 온 경우라면 함께 저녁을 먹는 게 일반적일 것 같지만 한스아저씨와 그 아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아저씨는 아저씨 또래의 아주머니 세 명과 와인파티를 즐기고 있었고, 아들은 아들대로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에서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해주며 여행을 즐기는 부자의 모습이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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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지만 실망했던 뽈뽀, 그리고 한스아저씨


멜리데는 비교적 큰 마을이라 그런지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으며 멜리데를 빠져 나와 숲길로 다시 들어갔다. 조금씩 걸어가다 보니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나를 기분 좋게 스치고 지나간다. 오아시스라는 말이 정말 딱 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늘이 있는 곳만 시원했다. 적당한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숲과 어떤 길 위에서라도 볼 수 있는 화살표, 그리고 모자를 쓰고 등산스틱을 든 내 모습이 익숙하다. 이제 며칠 뒤면 이 파란 배경의 노란 화살표가 그리워지겠지.


오늘은 조금 덥지만, 정말 걷기 좋은 날씨에 걷기 좋은 길들만 모아놓은 느낌이다. 키가 큰 나무들 사이로 쭉 뻗은 길을 걷고 있으니 너무 행복했다. 그 와중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나무들 사이로 적당히 내비치는 따뜻한 햇볕이 나를 감싸안았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 그 자리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나뭇잎이 움직이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이렇게 좋은 곳에, 이렇게 좋은 기분으로 앉아있으니 문득 네가 생각나더라. 잘 지내고 있을까. 언제나와 같은 일상 속에서 너는 너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을까.


내가 차츰 너의 행복을 빌어주면서 천천히 너를 잊어가고 있단 걸 깨달았다. 나는 너를 잊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결국 너를 잊어갈 테고, 너 역시 나를 잊어가겠지. 조금씩 잊어가는 게 느껴질수록 서서히 멀어지는 것 또한 느껴진다. 그래도 썩 나쁘지만은 않다. 같이 걷던 석재오빠를 먼저 보내고 뒤에서 천천히 걷는데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예전에 첫사랑이 준 편지를 오랜만에 꺼내읽곤 밤새도록 기쁘게 울었던 그때처럼. 그때처럼 나는 너를 잊어 가고, 너를 보낸다. 그렇게 너를 떠올리고, 생각하고, 추억하며, 너를 보낸다. 지구 반대편의 스페인에서 너와의 기억을 묻어두고 갈게. 만나서 반가웠다고. 잘 지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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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집과 햇빛을 쨍쨍하게 받고 있는 꽃, 그리고 아직은 익지 않은 포도밭을 지나 보엔테(Boente)에 도착했다. 어느덧 50km 이하로 내려온 표지석을 보니 산티아고가 가까워지고 있는 게 실감이 났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보엔테는 굉장히 작은 마을로, 알베르게 두 개와 카페 몇 개가 전부인 곳이다. 하지만 산티아고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연결되어있어 그나마 마을이라는 명칭을 얻은 모양이다.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으니 대형 화물 트럭이 지나가면서 까만 먼지가 맥주에 내려앉았다. 카페에서 일기쓰는 걸 멈추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알베르게 시설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주택을 개조한 듯 욕조가 있는 샤워실이 있었고, 넓은 공간에 사람이 별로 없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 소가 된 기분으로 다리에 붙는 파리를 쫓는 이 순간마저도, 너무 좋다. 남에게 잘 보일 필요도, 날 속일 필요도 없이 오늘을 살아내는 내가 자랑스럽다.


- 산티아고까지 50km도 채 남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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