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까지 100km 남았다. 오랜만에 7시 전에 일어났다. 사리아를 포함한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표지석이 500m마다 있었다. 산티아고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중간에 포기하지 말라고 이렇게 많이 놓아둔 것 같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거미줄을 볼 수 있었는데, 이쪽 지방은 날씨가 자주 흐리다고 한다. 날씨가 흐린만큼 춥기도 해서 손발을 꽁꽁 싸매고 다녔다. 언제나처럼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표지석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걷고 또 걸었다. 사리아에서부터는 확실히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에서는 줄을 서서 걷는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줄을 서서 걷기보다는 이렇게 많은 순례자들이 걷고 있구나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오랜만에 큰 강이 나왔는데 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야 했다. 12세기에 지어졌던 이 다리는 포르토마린을 강 건너편의 다른 마을들과 연결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겐 그저 넘어야 할 힘든 존재일 뿐이었다. 안전장치 없이 높게 지어진 긴 다리를 건너가야 할 생각에 막막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건너가 보기로 했다. 다리 양쪽에 있는 좁은 인도로 걷고 있는데, 왼쪽은 큰 강이 흘렀고 오른쪽은 차가 쌩 지나가고 있었다. 강에 빠지는 게 덜 무서울까 차에 치이는 게 덜 무서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두려움을 안고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뎠다. 도저히 인도로는 갈 수가 없어서 차도로 내려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석재오빠가 그런 나를 뒤에서 지켜보더니 신호를 준다.
"지금 차 안 와!! 뛰어!!"
지나가는 차가 없을 때 차도로 내려가 후다닥 뛰어갔고,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리면 다시 인도에 올라가 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석재오빠의 신호를 받고 차도로 내려가서 한참을 뛰었는데도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픈 다리와 발, 무거운 짐 때문에 더 이상 뛸 수도 없을 무렵, 이번에는 석재오빠가 인도 쪽에서 함께 걸어줬다. 차도에서 걸을 때도 옆으로 강이 보여서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는데 오빠가 그런 나를 배려해준 모양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이 다리 위에서 보는 경치가 정말 멋있었다고.
다리를 건넜는데 이번엔 꽤 긴 계단이 나왔다. 계단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내가 지나온 다리가 보였다.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도착했다. 순례자들이 많이 지나는 도시라 그런지 공공 조형물도 순례길의 상징인 가리비를 응용한 것이 많았다. 편의점에 들어가 잠시 더위를 식혔다. 콜라와 간식을 사서 편의점 앞의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오빠가 벌떡 일어나더니 인상을 찡그린다. 지금까지 멀쩡하던 다리와 골반, 허리까지 통증이 심해져 한 쪽 다리를 제대로 못 움직일 정도라고 한다. 워낙 체력이 좋기도 한 데다 어디 아프다고 말 한 적 없는 분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게 처음이어서 몹시 당황했다. 얼핏 봐도 상태가 꽤 심각한 것처럼 보여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원래 목적지였던 마을까지 가는 걸 포기하고 포르토마린에서 쉬기로 결정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편의점에서 가장 가까운 알베르게를 찾아 체크인하려 했지만, 아직 1시밖에 안 되어서 그런지 오픈한 알베르게가 거의 없었다. 석재오빠에게 기다리라고 하고는 까미노 필그림 어플을 켜서 그나마 오픈 시간이 빠른 알베르게를 찾아보았다. 그렇게 찾아간 알베르게의 호스피탈레로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미 다른 순례자들이 많아서 더이상 예약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호스피탈레로의 completo(complete, 이미 만실)라는 사인에 나는 마음이 점점 더 급해져왔다. 당장 어디든 누워서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옆에 있었기에 나는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했다. 혹시 자리가 남아있는 다른 알베르게를 소개해줄 수 없는지 호스피탈레로에게 부탁을 드렸고,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 보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다시 돌아 온 호스피탈레로는 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밖으로 안내했다. 아마 근처에 있는 다른 알베르게에 가서 '오픈 시간 전이지만 이 사람들을 받아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고 오신 것 같았다. 그 덕에 우리는 빠르게 체크인할 수 있었다.
누워있는 석재오빠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일찍 체크인해서 할 일도 없겠다 오랜만에 낮잠을 잤다. 조금 자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는데 포르토마린을 대표하는 성당이 보였다.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 구경하고 성당 주변도 둘러보았다. 아파도 밥은 먹어야 해서 피자와 햄버거를 주문했다. 밥을 먹고 일어나 마을을 구경하다가 예쁜 강변에 앉아 한가로이 오후를 즐겼다. 간식과 과일 그리고 페이락코 우유를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낮잠을 잤기 때문일까, 늦은 밤인데도 아직 해가 쨍쨍해서일까. 잠이 안 오는 밤이었다.
오늘은 예정된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여유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아침이 유난이 흐렸고, 우유가 정말 맛있었다. 1일 1우유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500m마다 있는 화살표들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매 순간을 살고, 소중히 여기며,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 푸른 강이 흐르는 포르토마린에서의 하루. 오늘도 예쁜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