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차. 산티아고까지 100km, 생장에서 700km

by 양송이타파스
트리아카스테라에서의 아침


트리아카스테라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잘생긴 개가 어슬렁어슬렁 지나가는 카페에서 일반적인 아침메뉴인 카페라떼, 오렌지주스, 토스트를 주문했다. 오늘 도착하게 될 사리아(Sarria)는 산티아고에서 100km 가량 떨어진 마을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게 되면 증명서를 받을 수 있는데, 100km 이상만 걸어도 발급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리아에서 순례길을 시작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스페인을 포함한 인근 유럽에서는 수학여행으로 학생들이 순례길에 많이 오기도 하고, 휴가를 이용해서 직장인들이 짧게 걷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출발하는 마을인 만큼 생장처럼 순례자들이 많이 보였고, 순례자여권인 크레덴시알을 발급해주는 순례자 사무소도 있었다. 다만 사리아부터 산티아고까지는 매일 알베르게와 카페의 세요를 2~3개씩 받아야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걷다 보면 가끔 산길에서 아무데서나 털썩 주저앉아 쉬는 사람들이 있다. 다리를 주무르고 , 물집을 터트리며, 다른 사람에게 인사할 여유조차 없이 고개를 숙인 사람들이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생장에서 시작할 때와는 사뭇 다르게, 온몸에 느껴지는 고통에 몸서리쳤던 3~5일차의 내 모습과 그들이 겹쳐 보였다. 사리아나 그 주변 마을에서부터 시작한 사람들은 아마 지금이 처음 고통을 마주한 순간들일 것이다. 안타까워 도와주고 싶지만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걸을 수 없는 길인 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저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지나갔다. 생장에 두, 세 번씩 왔던 사람들도 설렘 반 두려움 반을 안고 있는 병아리 같은 내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어제 술을 먹다가 갑자기 석재오빠가 ‘너 지금까지 동행 없이 다니고 싶어 했는데 이렇게 다니는 거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괜찮으니까 같이 다닐 수 있었던 거고,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사이라는 걸 서로 잘 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대답했다. 오빠는 어땠냐고 되물어 보았다. 까리온으로 가는 17km가 순례길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었는데, 혼자 걸었더라면 못 걸었을 거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어제 술을 마시면서 얘기를 참 많이 했다. 음식 이야기, 술 이야기. 휘파람 이야기, 한 곡을 반복해서 듣는 것에 대한 이야기, 종교에 대한 이야기, 눈치에 대한 이야기, 사랑받고 미움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 한국에서 남자와 여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 인기에 대한 이야기, 직장에 대한 이야기. 배려에 대한 이야기, 담배에 대한 이야기, 죽음에 대한 이야기….


다만 한 번씩 내가 꺼내는 이야기와 주제들에 불편한 기색을 보인 적이 있었다. 불편한 주제이거나 의견이 나눠지는 것들에 유난히 그런 모습이 눈에 띄었다. 술이 좀 되었을 때 다시 물어보니 본인은 갈등이 너무 싫다고 했다. 자기 주변에 친구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게 싫은데 자기 때문에 싸우는 거라면 더더욱 싫다고 했다. 그래서 본인이 손해를 보더라도 조금 더 참는 편이고, 그 참는 것 때문에 속앓이를 할지언정 남들이 싸우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잘 하는 편은 아니며 공감이 본인에게는 꽤나 어려운 분야라고도 했다. 본인은 아버지의 그런 성격을 많이 닮았다고 한다.




걷다 보면 카페 테라스에 앉아서 콜라를 마시고 있는 오빠가 보인다. 그럼 나도 주문을 하고 자연스럽게 옆에 앉는다.


나는 담배를 싫어한다. 기호식품이긴 하지만 냄새도 싫고 연기도 싫고 피우는 모습은 더더욱 싫다. 그런데 유럽에 오면서부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그 모습을 한 달동안 보고 있으니 담배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석재오빠도 상당한 흡연자였는데 매일 아침 출발하기 전, 점심을 먹고 난 후, 알베르게에 도착한 직후는 꼭 담배를 피웠다. 거의 세상 모든 근심을 안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이 오빠가 담배 피우는 모습이 눈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한 번은 저게 그렇게 좋은 건가 싶어서 나도 담배를 피워 볼까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오빠에게 "오빠 혹시 제가 지금 담배를 달라고 하고 같이 피면 제가 후회하게 될까요." 라고 물어봤다. 그 말을 들은 오빠가 잠시 생각하더니 "아니, 너는 후회 안 할 것 같은데, 내가 후회할 것 같아.“ 라고 대답했다. 내 선택으로 담배를 피워서 내가 후회하는 건 괜찮지만,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후회하게 되는 건 싫어서 더 이상 담배 얘기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담배 해프닝은 끝이 났다. 사족이지만 이 오빠는 그 뒤로도 사실 아주 신나게 내 앞에서 담배를 피워댔다. 놀리는 건가.




산티아고에서 100km 전에 있는 마을 사리아, 그리고 계속되는 폭염


표지석들을 지나 저 멀리 오늘의 목적지가 보인다. 사리아(Sarria)에 도착했다. 내가 진짜 그 유명한 사리아까지 오게 되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을 입구부터 한국 라면을 파는 곳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 오른쪽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이곳 1번지 알베르게에는 한국어가 곳곳에 적혀 있었다. 짐을 정리해놓고 역대급 폭염 속에 간식을 먹으러 나왔다. 맥주와 하몽, 샐러드로 가볍게 배를 채우고 저녁거리를 사러 마트에 갔다.초코가 들어간 요거트, 돼지고기, 양송이, 메론, 초코바와 시리얼, 마늘, 체리, 오렌지, 우니클라우유!, 오렌지주스, 식빵, 와인에 물까지. 이렇게 전부 14유로로 약 19,000원 정도 나왔다. 알베르게 1층은 공용 부엌이었지만 사람이 별로 없어서 장을 본 걸 쭉 펼쳐놓았다. 저녁을 간단하게 해먹고 다시 밖에 나왔다. 혼자 나와서 무작정 걷다 보니 성당이 나왔다.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곳곳에 사리아의 문양이 있었지만 그래도 사리아에 온 게 실감이 안 나서 걷고, 또 걷기만 했다.


산티아고까지 100km 남은 사리아. 그 말은 즉 생장에서부터 벌써 700km나 왔다는 뜻이다. 하루에 20km씩 걷는다 해도 5일이면 내 순례길이 끝이 난다. 산티아고에서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산티아고 대성당을 바라보는 나는 어떤 기분으로 그 앞에 서 있게 될까. 얼마 남지 않은 순례길이 아쉽기만 하다. 그렇게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