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9km를 걸어서 오 페드로우소(O Pedrouzo)까지 가야한다. 이 쪽 지방은 거의 매일 아침이 흐린 것 같다. 마을을 조금 지나 숲길이 나왔다. 점점 어둑해지나 싶더니 갑자기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긴 옷을 껴입고 우비를 써도 날카로운 바람이 옷깃 안으로 들어왔다. 그 와중에 또 기온은 높아서 얼마나 덥고 찝찝했는지 모른다. 내가 툭툭 내뱉은 말에 신경이 쓰인 건지, 같이 걷던 석재오빠가 비에 젖은 내 우비를 자신의 우비와 함께 가방에 걸고 갔다. 나는 그제서야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내게 상대방을 위한 배려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무심코 내뱉은 감정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나는 알았어야 했다. 덥고 눅눅해서 짜증이 나는 걸 내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이 알아챌 수 있음에도, 나는 내 감정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큰 의미 없이 내뱉는 말이라도 듣는 사람에겐 내 감정이 부담일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생각해보면 석재오빠는 동행을 했던 기간 내내 나를 많이 배려해주었다. 다만 신기했던 건, 항상 오빠가 딱 두 걸음정도 나를 앞서갔던 것이다. 함께 걸을 때면 항상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딱 두 걸음의 간격.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오빠를 불러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쉬었다가고 싶으면 언제든 내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기고 싶을 땐 조용히 걸을 수 있었고, 길을 자주 잃어버리는 내가 더이상 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이 우리는 딱 두 걸음의 간격을 유지한 채 걸어갔다. 두 걸음이 주는 안정감에 취해 있다가 문득 예전에 봤던 영화가 생각났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어떤 영화에서 부부가 걸어갈 때 항상 남자 쪽이 앞서 걸어가고 여자 쪽이 뒤따라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현대로 넘어와서도 남편을 앞세우는 아내의 모습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이 수동적인 역할로 인한 고정관념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기에, 내가 그 수동성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져서 괜히 분한 마음에 석재오빠보다 더 빨리 걸어간 적이 있다.
하지만 막상 앞서 가 보니 내 앞엔 이제껏 내가 알던 그림과는 또 다른 모습이 펼쳐져있었다. 내가 보던 풍경들은 텅 빈 숲길과 석재오빠의 뒷모습이 교차된 것들이었는데, 한 걸음 앞서서 보는 풍경은 조금 낯설게 다가왔다. 앞서 걷는 사람은 뒤따라오는 동행을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했으며 화살표를 빠르게 찾아 안전한 길을 마련해 줘야하는 책임감과 부담이 있었다. 그 때 깨달았다. 내가 받아왔던 안정감은 앞 선 사람의 책임감으로 만들어진 거였다는 걸. 앞 선 자리라고 절대 편하지만은 않고 모든 자리에는 장점과 단점이 함께 있다는 걸.
비를 피하기 위해 카페에 들어왔다. 톡 쏘는 코카콜라와, 고소한 치즈가 쭉쭉 늘어나는 바게트 햄버거를 주문했다. 점점 구름이 걷히고 우비를 벗어도 괜찮을 정도의 날씨가 되어서 밖으로 나왔다. 12살인 딸과 함께 걷는 내 또래의 엄마를 만났다. 나와 그 친구 둘 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기에 부족한 의사표현은 바디랭귀지로 대체해야했다. 산티아고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이 친구가 내게 '투모로우!! 빅 뷰티풀 로드!! 칙!칙! 케테드랄!! 고 투 인포메이션 앤 에스크!!!' 라고 했는데 어쨌거나 성당 앞에 크고 아름다운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 같았다. 자세한 건 인포메이션에 가서 물어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싶다. 산티아고까지 24km 남았다는 표시판이 보인다. 그 말은 즉, 24km 이후에는 노란 화살표를 볼 수 없을 거란 뜻이다.
오 페드로우소(O Pedrouzo)에 도착했다. 날씨는 완전히 화창해졌다. 알베르게에 체크인하고 짐을 풀어놓았다. 계속해서 필요없는 짐을 버려온 터라 짐이 꽤 줄어있었다. 데일듯이 뜨거운 물만 나왔던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알고 보니 내가 들어간 곳만 고장이었다.), 정원에 있는 빨랫줄에 빨래를 널어놓았다.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샀다. 우니클라 우유, 체리, 복숭아, 요거트, 항상 기대하지만 항상 맛 없는 초콜릿, 맛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맛없어서 다 버려야했던 과자와, 언제나 맛있는 에스뜨레야 갈리시아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제 순례길은 하루가, 유럽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머리도, 손톱도 정리하며 재취업을 위한 이력서를 쓰겠지. 잠이 오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 운동도 하면서 나를 위한 하루를 보내지 않을까.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을 자는 평범한 일상을, 그런 하루하루를 길게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해가 뜨지 않은 새벽녘
배낭을 챙기는 부스럭 소리에 눈을 뜨고
전날 길에서 얻은 흙으로 새벽내 차가워진 신발에 부은 발을 구겨넣는 매일 아침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스틱을 잡고, 아픈 다리를 절뚝이며 시작하는 매일 아침
담배를 피며 등산화를 신는 석재오빠의 소리가
우리의 출발을 기대하게 만들어주는 나의 하루의 시작.
좋은 냄새가 나는 유칼립투스 나무 사이로 스쳐 내려오는 바람과
기류를 타고 번지는 빗방울들이 나를 기분좋게 만들어 준 어제, 그리고 오늘
히사이시조의 ‘summer’가 잘 어울리는 오늘같은 순간들
영원히 잊지 못 할 너무 행복한 순간들
나의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