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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a Feb 23. 2024

우리의 삶은 긴 서가 속 책과 같아

다른 삶을 들여다보며 든 생각

한국에서 나의 삶은 순위의 연속이었다.

어느 분야에서든 나는 '우등하거나' '열등했다'는 뜻이다.

내가 다니는 학교, 내가 사는 동네, 나의 외모, 나의 직업 ..


나와 우리는 자기 자신과 우리가 속한 모든 집단을 행과 열로 이루어진 엑셀 속에 넣고 정렬하기를 반복해왔다.

6개월간의 교환학생 생활 동안 만난 유럽 및 영어권 국가의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대학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으레 나오는 대화 주제인 '대학 생활을 끝내면 무얼 하고 싶냐'라는 질문이 어김없이 나왔을 때, 나는 어느 누군가는 한숨 섞인 답변을 내놓을 줄 알았다. (일단 나는 졸업하고 뭐 하고 싶냐는 질문을 제법 껄끄러워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대학생활 동안 수천 번 나눴던 대화 주제는 이번에는 흥미롭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다들 마치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장래희망을 발표하는 학생처럼 눈을 빛내며, 이런저런 것을 하고싶다 신나게 말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해보고 싶은 친구, 환경 분야 마케팅을 하고 싶다는 친구, 농장을 운영하고 싶은 친구..

나아가서 자기 나라에서 일을 못 구하면.. 다른 유럽 국가에 가서 일자리를 찾아보면 되지! 하고 해맑게 웃는 친구들을 보면서 참 해맑구나 하는 생각은 잠깐, 그들의 환경이 참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언어가 통하고, 이주하기 쉬운 인프라가 갖춰진 유럽에 살고 있어서 한국보다 이주가 쉽다는 것,

따라서 본인이 거주할 곳을 비교적 자유롭게 고를 수 있다는 것이 참 부러웠다.

국가를 고르고 나서도, 지방 거주인구 분포도 높고 인프라도 잘 되어있는 곳이 많아, 거주할 도시 선택지도 늘어난다는 건 덤이었다.


나를 부럽게 만든 이들의 환경은 '순위'에 그리 매달리지 않는 그들의 가치관 또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고학력자라고 해서 농장을 운영하지 말라는 법은 없고, 이름이 알려진 큰 회사에 다녀야 할 이유도 없다 -

그저 본인이 원하는 길이라면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든 크게 개의치 않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분야별로 줄세울 수 있다고 은연 중에 생각해왔고,

따라서 내가 어떠한 선택을 하든 이것보다 '나은' 선택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그 선택이 나와는 완전히 다른 트랙에 서 있는 사람의 선택이라도 말이다. (쌩 문과생이 단순히 돈을 많이 번다는 이유로 의대 가는 이과 1등을 부러워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사람들의 삶은 하나의 기준에 따라 수직으로 줄세워져 있는 사다리 구조가 아니라

책이 가득한 도서관 서가처럼, 색인에 따라 수평으로 쭉 늘어놓아져 있는 구조라는 것,


정치/경제 분야 책이 문학책보다 '나은' 책으로 평가받을 수 없듯이,

내게는 내게 맞는 삶의 모습이 있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자유롭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이치를 간접적으로나마 실제로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가질 수도 없고, 어쩌면 내게 꼭 필요하지 않을 것들을 시기하며 끝없는 절망을 선택하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도 짧다.

나는 내가 위치한 서가에서 당당히 하나의 이야기를 차지하고 있고,
같은/다른 구역에 있는 책들은 내가 펼쳐보며 나의 세계를 넓히는 방법으로 사용하면 될 테다.


짧게나마 경험한 것을 곧바로 나의 삶에 적용시키기에 아직 내게 용기는 부족하지만,

언젠가 이를 적용할 기회가 생겼을 때 이것이 기회임을 인지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날이 오기 전에도 나의 선택에 너그러워지기를 희망하며,

교환학생 당시 얻어왔던 가장 좋았던 메시지 중 하나를 정리해서 올린다.



아이슬란드 책방에서 찾은 책의 한 페이지. 모로 봐도 기묘한 삶이라면 너그러이 받아들일 것 


*p.s. 이 글은 졸업 시즌을 맞아 내가 좋아하는 허준이 교수님의 졸업식 축사를 다시 읽어보며 써야겠다고 결심한 글이다! 읽을 때마다 울림이 다른 글이니 아직 읽어봤거나 읽어본 오래된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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