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그 배우 하정우?"
처음 이 책을 추천받았을 때, 했던 생각이다. 하정우 배우가 그림을 그리고 전시도 연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번에는 책을 썼다고 해서 솔직히 반신반의하며 '얼마나 재밌겠어?' 하는 심정으로 첫 장을 펼쳤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생각을 철회해야 했다. 그리고 하정우란 사람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하정우 배우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느끼고 깨달은 점을 기록한 이 책이 마치 내게 필요한 조언을 엮어둔 지침서 같았다. 책을 읽는 내내 몇 번이나 멈춰서 같은 구절을 밑줄 그어가며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는지 모른다.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고 하정우 씨는 배우이자 화가인데, 결국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는 직업을 불문하고 비슷하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몸과 마음 상태 모두 심연의 밑바닥을 찍었던 슬럼프 기간. 그 기간에 나는 동안 퇴근하고 집에 오면 피곤해서 쉬어야 한다는 핑계로 이불 속에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주말에도 음식은 모두 배달 시켜 먹고 집 밖으로도 나가지 않고 12시간 넘게 잠만 잤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몸과 마음은 회복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가라앉기만 할 뿐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왜 그런지 알 수 없어 우울증이 오려나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사실 간단한 이유였다. 나는 휴식을 취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휴식을 취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적어도 일할 때만큼은 공들여서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하지 않을까?
- '휴식은 가만히 누워 있는 게 아니야' 중
일을 오래하고 싶은 만큼, 휴식도 신경쓰고 잘 계획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일과 휴식을 어중간하게 뒤섞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휴식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일이 바쁠 때 '나중에 몰아서 쉬어야지' 같은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대지 않는 것.
- '휴식은 가만히 누워 있는 게 아니야' 중
그렇다, 휴식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행동이다. 실제로 규칙적으로 적정 시간만 잠을 자고 꾸준히 운동하고 기분을 전환하는 활동을 틈틈히 하는 요즘은 지쳐서 힘이 없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않는다. 퇴근 후와 주말에 아무것도 하지 않던 슬럼프 기간보다 더 바쁘고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너무 바빠서, 지치고 피곤해서, 감당하기 어려워서, 할 만큼 다 해봤는데 안 돼서 등. 계획했던 일을 끝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둘 때마다 항상 둘러대는 핑계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내가 이 계획을 완수하지 못한 건 이런저런 이유 때문이야. 다음에 그 이유를 해결하고 다시 하면 되지.'라고 다독였다. 하지만 그건 모두 자신을 속이는 자기합리화였다.
고통보다 사람들 더 쉽게 무너뜨리는 건,
어쩌면 귀찮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다 견뎌내면 의미가 있으리라는 한줌의 기대가 있지만, 귀찮다는 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하찮게 느껴진다는 거니까. 이 모든 게 헛짓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차오른다는 거니까.
- '10만 보 일기' 중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 '10만 보 일기' 중
그렇다. 바쁘고 피곤하고 어렵고 힘들다는 핑계의 기저에는 '귀찮음'이 있었다. 정말로 내가 포기해야 할 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귀찮아서 하기 싫은 내 모습을 부정하고자 그럴싸한 포장지를 씌운 거였다.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위기와 절망 속에 있을 때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때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의심한다. 어쩌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모른 채 힘든 시간을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을 노력이라 착각하진 않는지 가늠해본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입을 크게 벌리고 부동자세로 감이 떨어지길 계속 기다리자니 턱이 아프고 온몸이 저리다. 간절히 기다리는 감은 떨어질 기미도 안 보이고, 나무에서는 온갖 벌레만 내려와서 약 올리듯 몸을 기어다닌다. 근질거리고, 당연히 고통스럽다.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어마어마한 고통을 감당하면서 분명 어떤 노력을 하긴 했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들, 이를테면 나무 위로 올라가서 나뭇가지를 자르든, 온 힘을 다해 나무둥치를 흔들든, 마을로 내려가 장대를 가져와서 감을 때든, 그 시간에 다른 일들을 시도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혹시 내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건 아닌지 수시로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 '내가 만난 노력의 장인들' 중
그동안 나는 그저 가진 에너지를 최대한 쏟아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면 당연히 그게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쏟는 에너지의 방향이 올바른지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다.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앞으로는 중간중간 자기 점검을 해야겠다. 내가 하는 노력이 정말로 최선인지 아니면 그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무의미한 노력인지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몇 달이 지나서 독후감을 쓰는 지금, 위의 세 가지 얘기는 이 책을 생각할 때마다 자동으로 떠오르는 내용이다. 그만큼 책을 읽을 때 망치로 머리를 맞는 듯한 충격을 남긴 부분이기도 하다.
위 세 부분만큼 기억이 또렷하진 않지만, 책에는 많은 밑줄이 그어져 있다. 감정조절, 균형, 끈기, 자신감 등에 대한 이야기...
기분은 인생에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당장의 기분을 바꿀 수 있다면,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기분 탓인가?' 중
내 갈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 '왜 자꾸만 나를 잃어버리지?' 중
어느 날에는 기대 이상으로 좋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다. 또 어떤 날에는 나 자신에게 너무도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결과에 휘둘리지 않고 꾸준히 작업해 나가는 것이다. 나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고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신데렐라의 비밀' 중
자신감을 가지는 것과 자신을 확신하는 상태는 얼핏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다른 문제 같다. 만약 어떤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다면 후회나 미련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열심히 보낸 시간 자체가 나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감이란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열심히 한 일을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 '나를 확신할 수 없다' 중
죽을 만큼 힘든 사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 '10만 보 일기' 중
흔히들 말하는 '책은 인생의 교과서'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조언을 남겨준 <걷는 사람>. 가벼운 마음으로 그리고 조금은 하찮게 생각하며 읽기 시작한 책이 이토록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니... 처음으로 책의 힘을 온몸으로 체감한 경험. 앞으로는 어떤 책이든 좀 더 존중하는 마음으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