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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재 Nov 21. 2024

일시적이지 않은 것.

주취자와 경찰 간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 남자는 경찰이 도착하기 전까지 고성방가를 하며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이 도착한 뒤엔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눈물을 흘린다. 경찰들은 이곳에서 이러면 안 된다며 남자를 끌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몇 분 뒤 열차 내 사정으로 지연됐다 말하며 출발하겠다는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지하철이 닫히는 순간 나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지하철은 한강을 가로질러 건너간다. 창 밖에 바라보는 순간엔 나의 얼굴이 비춰 보인다. 

생기 없는 얼굴엔 행복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남자에게서 보인다고 생각하던 슬픔의 그림자는 나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연애가 끝나고 달라지지 않은 건 겉보기에 멀쩡한 나의 몸 하나에 불과한 것 같다. 

그만큼 너무 많은 것들이 나의 삶에서 떨어져 나갔다. 

긴 연애를 했음에도 달라지지 않은 나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겠다던 그 사람. 

붙잡으며 마지막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들어달라던 말에 매몰차게 떠나버렸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 선택엔 네 의견이 가장 중요했고 그래서 망설이게 됐고 혹시라도 좋아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했을 뿐이라고. 

역을 나와 걷는 동안엔 쉴 새 없이 울려대는 핸드폰 화면에서 알 수 없는 번호가 보였다. 

불특정 다수에게 전화를 걸어대는 광고 전화였다. 화면만 바라보다 이내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집 앞에 서서 잠시동안 망설였던 건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곳으로 들어가기가 주저됐기 때문이다. 망설이는 사이 옆집 사람이 문을 열고 나오느라 어색한 인사를 하고 말았다. 열쇠를 넣고 돌리자 현관문이 열렸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의미 없이 반복적으로 채널을 돌린다. 무엇이 보고 싶어서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다 한 채널 앞에서 리모컨을 내려놓게 됐다. 

연일 신규개발 된 수술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멈춘 채널에서도 그에 관련된 토론이 진행 중이었다. 

'사랑을 지우는 수술'. 말 그대로 '사랑'을 느끼는 뇌의 일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찬성 측과 반대 측이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었다.

진행자는 과열된 분위기를 식히기 위해 잠시 광고를 보고 온다는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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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후,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대형 LED화면에서는 한 병원의 광고가 연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더 이상 사랑 때문에 고통받지 마세요."

이윽고 편안한 표정을 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편이 사고로 떠나고 전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어요. 매 순간 죽고 싶다는 생각이 저를 떠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다시 일상생활을 시작했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어요. 이런 저의 선택을 남편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이라는 감정을 없애는 것이 가능한 세상. 

인류가 지금까지 발전해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인 사랑을 지우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어느샌가 점차 호기심과 관심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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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분을 는 제거시키는 일은 생각만큼 단순한 수술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술 후 일시적으로 신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이는 짧은 시간에 불과하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미리 연결해 둔 주삿바늘을 통해 마취용액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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