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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아 Nov 30. 2021

낯선 세계의 매혹

- 스페인 여행 - 

 

   지난(2019) 사월 친구와 둘이서 2주 일정으로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하는 동안 예기치 못한 상황과 사건들이 돌발했다. 두 달 전부터 계획한 루트와 일정이 무색해지는 순간들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몬테라토 수도원 갈 때 기차표를 끊는 문제부터 어려움에 부딪쳤다. 스페인어 매표기 앞에서 한 참을 허둥대다 역무원의 도움으로 겨우 표를 끊었다. 표를 끊고 나서야 매표기에 영어 버전이 있는 걸 알았을 땐 스스로가 어이없고 한심했다. 바르셀로나로 돌아오는 길엔 산악열차를 잘못 내려 환승할 기차를 놓쳤다. 어둠이 내리는 플랫폼에 웅크리고 앉아 한 시간이나 다음 기차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떠난 산마을 작은 역은 적막하고 처량했다.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카탈루냐 미술관 앞 분수 쇼는 하루 동안의 동동거림과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줄 만큼 황홀했다.    


   코르도바에서는 이슬람 최대 사원인 메스키타와 알카사르의 ‘물의 정원’을 보는 것이 목표였다. 세비야를 출발해 밀밭이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을 가로질러 두 시간을 달렸다. 코르도바에 도착해 주차장을 찾았지만 가는 곳마다 꽉 차있었다. 삼십 분 넘게 헤맨 뒤 후미진 골목길 담벼락 아래 빈자리를 찾았다. 친구와 난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닭 꼬치와 샐러드로 점심을 때운 후 택시를 타고 알카사르로 이동했다. 티켓을 끊기 위해 줄을 섰는데 뭔가 께름칙했다. 주차장을 찾아다니느라 혼이 빠져 차문 잠그는 걸 깜빡한 것이다. 그때부터 걱정이 시작됐다. ‘다시 돌아가 차문 잠그고 올까?’ ‘이렇게 기다리는 줄이 긴데 언제 다녀와?’ ‘설마 누가 차를 끌고 갈까?’ 온갖 생각을 하다가 티켓을 끊었다. 



   코르도바 알카사르는 이슬람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아브딜 왕이 감금되었던 곳이자, 콜럼버스가 신대륙으로 떠나기 전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을 알현했던 곳이다. 하지만 차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의 정원’에 이르러서야 잊을 수 있었다. 정원을 가득 채운 꽃향기와 아름다운 풍경이 불안을 밀어냈다. 연못을 따라 늘어선 거대한 기둥모양의 사이프러스는 고대 신전의 열주를 떠올리게 했다. 황금빛 오렌지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오렌지 나무, 나무 그림자에 흔들리는 초록빛 연못, 포물선을 그리며 반짝이는 분수까지 마치 신들의 정원을 걷는 것 같았다. 정원을 나오자 다시 불안해져서 메스키타 관람은 포기했다. 서둘러 택시를 탔다. 렌터카는 처음 세워둔 자리에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그대로 있었다.  


   말라가에서 그라나다로 넘어갈 땐 블로그에서 읽은 동화처럼 예쁘다는 마을 ‘카필레이나’, ‘부비온’, ‘팜파레이나’를 들르기로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접어든 길은 굽이굽이 천 길 낭떠러지 길이었다. 협곡을 끼고도는 산맥의 겨드랑이를 따라 두 시간 가까이 곡예 운전을 했다.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어깨는 굳고 핸들을 쥔 손등엔 힘줄이 불거졌다. “이런 길인 줄 알았다면 오지 않는 건데.” 운전하는 내내 험난한 길로 이끈 블로그를 원망했다. 


  

  곡예 운전 끝에 도착한 ‘카필레이나’는 긴장으로 오그라들었던 몸과 마음이 한순간에 풀어질 만큼 예뻤다. 하얀 지붕과 담벼락에 쏟아지는 햇살,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 벽을 장식한 붉은 꽃들,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수로의 물소리…. 늘 그렇듯 샛길은 위험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숨겨두고 있었다. 조금 더 위쪽에 있는 마을 ‘부비온’과 ‘팜파레이나’도 함께 돌아보았다. 마을을 둘러보고 멀리 시에라네바다의 봉우리를 덮고 있는 만년설을 바라보며 송어요리에 와인을 곁들인 점심을 먹었다. 스페인 여행 중 최고의 점심이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해발 3400미터의 ‘눈 덮인 산맥’이란 뜻의 시에라네바다 중턱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1492년 이슬람교도 무어인들이 그라나다를 넘겨주고 120년 동안 저항했던 마지막 저항 지였다. 우린 의도치 않게 아름다움에 이끌려 스페인에 남아있는 이슬람 왕국의 마지막 흔적을 보고 왔던 것이다.  


   이후의 여정에서도 난관은 날마다 이어졌다. 렌터카를 반납하는 날엔 렌터카 영업소를 찾아 두 시간 가까이 그라나다 역 주변을 빙빙 돌았다. 휴일이라 문이 잠긴 영업소 앞에서 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리다 한 나절을 다 보냈다. 마지막 여정이었던 산티아고 순례길 맛보기는 세 시간 만에 접어야 했다. 발가락 물집 때문에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도중에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야 했다. 마드리드에서 마지막 잠자리를 위해 호텔을 찾아갈 땐 바우처에 있는 호텔 이름이 바뀌어 솔 광장 주변 골목을 헤매고 또 헤맸다. 하지만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도움의 손길이 있었고,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됐다. 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찾아오는 안도와 평화, 작은 깨달음들이 다음 여정을 이어가게 했다.    


  겁 많아, 걱정 많아, 방향감각 없어서 길 못 찾아, 버스 타도 멀미해, 조금만 걸어도 물집 잡혀… 여행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체와 멘털을 가졌으면서도 떠나기를 반복한다.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나게 될 풍경과 사람들,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사건들에 대한 동경이 늘 낯선 곳으로 이끈다. 불안과 설렘을 안고 떠난 그곳엔 넘어야 할 산과 견뎌야 할 고통이 있다. 고통의 크기에 비례하는 감동과 경이로움 그리고 환희가 있다. 그 경험은 일상으로 돌아와 삶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무의식 속에 잠재한 일종의 신념’인 각자의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내 안에는 주기적으로 떠나 낯선 것들과 한바탕 춤을 추고 돌아와야 다시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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