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사인 《시를 어루만지다》를 읽고 -
책을 펼치기 전 나도 모르게 책 표지를 어루만지고 있다. 까만 하드보드지 표지 위 얇게 돋을새김 된 글자들의 감촉이 느껴진다. 《시를 어루만지다》라는 제목 때문이었는지, 읽고 싶던 책을 천천히 아껴 읽고 싶어서였는지 모를 일이다. 겉표지 안 쪽 저자 약력과 사진도 오래 들여다본다. 머리말도 한 줄 한 줄 정성 들여 읽는다. 시인인 저자는 “시 공부는 말과 마음을 ‘잘 섬기는’ 데에 있고, 이 삶과 세계를 잘 받들어 치르는 데 있다”라고 한다. “사랑이 투입되지 않으면 시는 읽힐 수 없다”라고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책장을 넘기는 내 모습에서 이심전심 저자의 마음이 내게 전해지는 걸 느낀다.
저자는 ‘시에게 가는 길’에서 시에 임하는 자세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겸허와 공경’이다. 시 앞에서 겸허하고 공경스러워야 내 마음의 문이 열리고, 비로소 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목소리와 빛깔과 냄새들에 닿을 수 있다고 한다. 둘째는 ‘공감과 일치의 능력’이다. 시를 쓰거나 읽기 위해선 추상적 개념이 아닌 ‘실물(實物)적 상상력의 운용능력과 공감과 일치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셋째는 ‘시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한다. 시를 읽을 때는 시를 어루만져보고, 냄새 맡고, 미세한 색상의 차이를 맛보며 ‘나의 온몸으로 시의 온몸을 등신대(等身大)’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시를 읽는 것은 나의 온몸으로 시의 온몸을 등신대(等身大)로 만나는 것이다. (19쪽)
이 책은 시 읽는 법과 함께 전통 서정시와 전위적 성향을 지닌 시편들에 저자의 감상을 곁들여 소개하고 있다. 시 한 편 한 편에서 길어 올린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노라면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지고, 삶의 비의와 애환이 담긴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에서 첫 번째로 만난 서정주의 시「영산홍」을 읽을 땐 고요하고 쓸쓸한 봄 풍경과 시에 등장하는 소실 댁의 삶이 그려지며 가슴이 아릿해졌다. 10행의 짧은 시 속에서 어릴 적 고향집 마당이 떠오르고, 잠깐 살다 떠난 친구 아버지의 소실 댁 박꽃 같던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 집 햇살 환한 툇마루에 놓여있던 놋요강도 떠올랐다.
저자가‘소실 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에서 ‘숙명적인 막막함과 안쓰러움, 사는 일의 쓰디씀’에 대해 말할 땐 울컥 눈물을 쏟을 뻔했다. 내 기억 속 어릴 적 풍경과 얼굴들, 슬프고 아름다웠던 이야기가 시와 겹쳐지면서 갖가지 색깔의 감정이 출렁거렸다. 저자 말대로 ‘나의 온몸으로 시의 온몸을 등신대’로 만나는 경험이었다. 심지어 저자는 이런 시를 만나면 ‘차라리 그 시 속에 들어가 먹고 자면서 한 두어 달쯤 살다가 나왔으면’ 싶다고 한다. 그럼 ‘세상살이를 보는 우리 눈이 좀 더 깊고 그윽해질 것’이라 한다. 이 보다 더 깊고 극진하게 시를 만나는 방법이 있을까. 사랑이 아니면 절대 이를 수 없는 경지다. ‘시 속에 들어가 살다’란 말이 자꾸 떠오른다. 결국 시를 읽는 일은 시를 온몸으로 살며 그 속에 담긴 삶과 세계의 아름다움을 만나고 사랑하는 일인 것이다.
차라리 그 시 속에 들어가 먹고 자면서 한 두어 달쯤 살다가 나왔으면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세상살이를 보는 우리의 눈이 좀 더 깊고 그윽해질 터이다. (22쪽)
저자는 시를 공경하는 마음이 곧 ‘인간에 대한 겸허와 공경이고, 풀, 돌, 나무, 벌레들에 대한 공경에 통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공경’이라고 한다. 시를 읽는 순간은 시와 세계와 나가 하나로 연결되는 아름답고 숭고한 순간인 것이다. 이 책 덕분에 잊고 있었던 시를 다시 깊게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저자처럼 팍 꽂히는 시를 만나면 그 속에 들어가 한 두어 달쯤 살다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영산홍
서정주
영산홍 꽃잎에는
山이 어리고
山자락에 낮잠 든
슬픈 小室宅
小室宅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山 너머 바다는
보름 살이 때
소금 발에 쓰려서
우는 갈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