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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Feb 24. 2021

어떤 걸 지울래?

블랙 미러 시즌 1. <당신의 모든 순간>

*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종교와 예술, 문학, 법은 사피엔스의 상상력이 탄생시킨 '상상의 질서'라며 사피엔스 종의 지구 정복 근거를 허구로 정의했다. 없는 이야기 지어내는 능력. 페터 비에리는 허구(픽션)를 통해 자아과 세상을 성찰해야 한다며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이명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써서 자신이 사피엔스 후예임을 증명했다. 호기심과 상상력을 장착한 사람은 현대 과학 기술이라는 노를 양손에 쥐고 어제의 허구를 오늘의 실제로 실현하며 진화의 바다를 건너는 중이다. 문제는 생물학과 인식의 진화 속도를 추월한 과학의 발전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 거대한 진화의 바다에서 인식의 구토로 몸부림치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생존자는 누구일까. 아니. 무엇일까.



각 시즌이 3~6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총 5개 시즌인 SF장르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 과학 발전 속도를 현재와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상상해 낸 미래 이야기. 지금은 허구지만, 언젠가는 실제가 될 수도 있는. 과학과 예술의 환상적 콜라보로 탄생한 기존 SF 장르의 보편적 이미지와 명확한 선긋기로 확보한 차별성이 돋보이는 이 드라마는 옆구리에 물리 책 끼고 감상해야 하는 난해한 미래나 지나친 호기심으로 본래 목적을 잃고 판타지로 전락한 미래, 다짜고짜 광활한 우주에서 싸우는 우주 전쟁 이야기와는 거리를 둔 현재 밀착형 SF 장르다. 물리 이론 같은 거 하나도 몰라도 되고  상상력 좀 부실해도 소화할 수 있는 미래. 분명 SF 장르인데, 치명적 냉기 발산하는 금속 재질 대신 푹신한 소파가, 광활한 우주를 떠돌며 로봇과 친구 먹는 정체성 모호한 인간군상 대신 방금 길거리에서 마주친 것 같은 얼굴이 보인다. 정형화된 미래상에서 탈피한, 현재'와 쌍둥이처럼 닮은 꼴인 미래는 쫀쫀한 흡입력으로 몰입감을 업그레이드시킨다. 친구들과의 모임. 배우자에 대한 의심과 집착. 다른 이성을 향한 호기심. 소외에 대한 불안.  뭐, 미래라고 별로 다르지 않은데? 이질감 제로라며 방심한 사이, '기억'으로 신분 증명하며 통과하는 공항 검색대와 커피 한 잔보다 싼 가격에 오른쪽 귀 뒤에 삽입한 기억저장장치 '그레인'이 끼어들며 이거 왜 이래, 여긴 미래야. SF라고! 한 대 쥐어박고 달아난다. 아얏.


미래의 기억

시즌 1의 에피소드 <당신의 모든 순간>.


기억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기억에 대한 호기심과 물음이 이 에피소드를 선택한 이유다.



'살아가고, 숨 쉬고, 냄새 맡고.

기억의 모든 영역입니다.

커피 한잔보다 싼 가격으로

윌로우 그레인을 업그레이하고

무료로 30년의 기억을 백업할 수 있습니다.

마취를 한 채 프로세스를 심으면

간단하게 끝납니다.

기억은 곧 생존이니까요.'


'쓰레기는 가라앉지만, 보물은 뜨게 하'는 보물사냥 같은 직장 면접을 마친 리암 폭스웰.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기억저장장치, '그레인'으로 면접 당시 상황을 재생한다. 합격일까. 불합격일까. 리암은 다양한 각도로 줌아웃된 화면을 빨리 감고 되감고, 정지하며 기억을 잘게 잘게 쪼개며 면접관의 표정과 행동, 언어를 분석하느라 불안에 잠식당한 채 아내 친구 모임에 도착한다. 모임 후엔 아내 피와 조나스의 관계를 의심하며 모임 당시 기억을 스크린에 띄우고 반복 재생하며 스스로에게, 아내에게, 보모에게, 조나스에게 묻는다.


이상하지 않아?


숨은 그림 찾듯 기억을 헤집으며 분석하고 파헤치며 끈질기게 추적한 리암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분노한다.


"뭔가 의심스러울 때는 그게 사실로 밝혀지는 게 나아. 몇 년간 썩은 이가 있는데, 결국 혀로 찾아내 썩은 곳을 파내는 것과 같지."



가정은 무너지고, 관계는 끊어진다. 그토록 받고 싶던 아내의 사랑 가득한 눈빛을 기억 속에서 발견한 리암. 자신이 '썩은 이'에 집착한 나머지 '건강한 치아'까지 뽑았다는 그의 때늦은 자각. 현재를 밀어낸 자리에 떠도는 기억의 유령들. 



기억 : 과거의 사물에 대한 것이나 지식 따위를 머릿속에 새겨두어 보존하거나 되살려 생각해 냄.


기억의 보존과 삭제 기준은 뭘까. 왜 어떤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어떤 기억은 감쪽같이 사라질까. 의식과 무의식 중 그걸 담당하는 영역은 어딜까. 기억을 원자 단위로 잘게 잘게 쪼개 단물이 배어 나오게 곱씹으며 영혼의 상처를 들쑤시던 내 모습이 광기 어린 자기 검열로 기억의 자해를 일삼는 리암의 모습 위로 오버랩된다. 기억 속 상처가 현재의 날 옭아매며 목 조르던 공포. 부풀어 오르는 기시감.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나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존재를 두고 고민했다. 육체가 나일까. 영혼이 나일까. 사유와 감정이 나일까. 인식이 나일까. 존재가 기억이라면, 기억은 뭘로 증명할 수 있을까.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어떤 형태의 기록이지? 


존재는 기억이야.

기억은 사유와 감정과 인식의 저장고야.

기억은 언어를 통해 기록될 거야.

기록을 통해 존재는 남겨지는 거야.


내게 각인된 관계와 세상을 기록했다. 서서히 완성된 존재의 퍼즐. 과거와 현재, 때로 미래를 유영하면서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기억 속 공포와 조우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맑음.  불안이 증폭시킨 상처는 괴물이 되어 겁에 질려 달아나는 날 잡아챘다. 글쓰기로 불안을 걷어내자 흉측한 괴물인 줄 알았던 상처는 새앙쥐만큼 작아졌다. 에게. 겨우 요것 때문에 내가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거야? 픽, 새어 나온 헛웃음. 비로소 상처 위에 앉은 딱지. 안개 걷히듯 옅어진 죽음의 공포. 언어로 전환된 상처는 더는 날 해하지 못했다. 나는 기억의 바다에 글쓰기 그물을 내리고 기억을 낚는 어부가 되었다. 그 바다는 어느 날은 잔잔했고, 어느 날은 폭풍우 몰아치며 울부짖었다.


언어로 기록된 기억의 부정확함을 지적하며 비디오로 저장된 기억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미래의 과학이 내게 묻는다.


"니 기억, 그거 정확해?"


정확도? 글쎄. 기억은 원래 뒤틀리고 엉킨 거 아니야? 대부분의 기억은 헐거운 그물망으로 빠져나가서 망각의 파도로 부서졌다. 남은 기억도 찢기고 오염되고 변형되었다. 시간은 제멋대로 기억을 조작하고 편집했다. 객관적 사실로서의 기억은 없다. 기억은 마치 생명체처럼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졌다. 드라마 속 리암이 커다란 화면에 띄워놓고 보고 또 보며 집착하던 선연한 '기억의 드라마'는 없다. 모든 치유 수단 차단당한 채 맘만 먹으면 방금 전 일처럼 생생하게 꺼내볼 수 있는 '기억'은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어 존재를 집어삼키는 무기로 돌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짙었다. 잊힐 권리 상실한 기억은 존재를 내리치는 흉기로 돌변했다. 기억의 썩은 이와 함께 침몰하는 리암. 그 장면에서 나는 내 기억의 불완전함과 부정확함에 안도했다.  얼기설기 구멍 뚫린 내 기억 그물의 헐거움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잊고 싶어서 다 지워버렸어!"


불륜 기억을 재생하라는 리암에게 아내 피는 소리친다. 기억저장장치 '윌로우 그레인'의 최대 장점은 삭제 기능. 선택적 망각이 가능하다. 그러나 드라마 속 그 누구도 그럴 의사가 없어 뵌다. 화면에 각자의 기억을 띄우고 드라마처럼 기억을 시청하는 사람들. 기억 사슬에 묶여 추억을 공유하고, 섹스를 공유하고, 불안을 공유하고. 유발 하라리가 말하지 않았나. 사피엔스의 생존 전략은 있는 그대로 보는 사실 신봉이 아니라 없는 이야기 지어내는 상상력이라고. 유발 하라리가 현실에서 드라마 속 인물들과 마주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명징한 팩트 드라마 그만 보고 채널 돌려 허구 드라마나 시청하시죠~.


상처 가득한 영혼의 치료제는 빈틈없는 사실이 아닌 숨구멍 숭숭 뚫린 허구가 아닐는지. 암호화되지 않은 '그레인'을 도둑맞아 기억을 잃은 할럼. 자발적 의지로 '그레인' 거부를 선택한 사람들. 호기심이든, 용기든 불안의 뿌리 제거한 사람은 그곳, 미래에도 있었다.  '그레인' 광고 문구는 수정되어야 한다. 인간에게 생존은 기억이 아닌 망각이다.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건 과학이 주는 축복이 아닌 재앙이다. '그레인'을 잃은 할럼은 말한다.


"난 지금 더 행복해요."



존재를 침몰시키는 기억의 썩은 이빨 같은 상처들. 

지울 수 없는 상처 끌어안고 기억의 바다를 표류하는 당신에게 이 드라마는 묻는다.


"어떤 걸 지울래?"


사진 출처 : https://m.blog.naver.com/fojesus/222197812191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심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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