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Oct 31. 2021

좋은 친구

善友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원하든 원치 않든 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길 원한다. 소셜미디어 덕에 물리적 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이와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면서 그 욕구는 어지간히 충족된 듯 보였다. 각자의 공간에 고립된 팬데믹 세상은 그 속도와 범위를 가속화시키고 확장시켰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미래에 벌써 와있는지도 몰랐다. 침대에 누워서, 혹은 책상에 앉아서 전 세계인과 연결되는 그런 미래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밥 한 번 먹은 적 없는 이들과 '좋아요'를 나누며 일상과 감정을 공유하는 게 더는 낯설지 않다. 그러한 것들이 선별적 드러내기와 엿보기에 한정되었다고는 하나, 생각해보면 오프라인이라고 해서 모든 걸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감정 표현은 익명성이 보장된 가상 세계에서 더 적극적이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만 명과 손가락 터치 한 번이면 연결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아니 더 외로울까? 얼마 전 다녀온 리움 미술관 <인간, 일곱 개의 질문> 전시에서 만난 질문. 

 

'우리는 진정한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그 어느 시대보다 열린 세상에서 현실과 가상을 종횡무진 누비며 거미줄처럼 타자와 연결된 현대인의 자화상은 역설적이게도 소외와 단절의 상처로 가득하다. 풍요 속 빈곤이랄까. 그 아이러니함이 불러온 씁쓸함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낯가림이 심하다. 누가 봐도 포인트를 벗어난 과한 웃음과 끄덕임은 낯가림을 어떻게든 무마해보려는 어설픈 몸짓인데, 처음 만나는 이들은 그걸 사교적 제스처로 오해했다. 낯가림 탓에 관계의 폭은 좁아도 오래 그리고 깊은 관계를 맺었다. 시쳇말로 '한 놈만 팼다'.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일당 백'이라며 으름장을 놓고 수시로 올가미를 씌웠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해도 가상 세상에서도 낯가림은 여전했다. 주위를 빙빙 돌며 섣불리 다가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찌감치 물러나지도 않았다. 도망가지 않는 내가 대견할 따름. 돌이켜보면 관계의 시작은 어떤 끌림이었다. 감정이 먼저였고, 이유는 나중에 갖다 붙였다. 재밌어서. 말이 잘 통해서. 취향이 비슷해서. 배울 점이 많아서. 2019년부터 블로그에 글을 썼다. '서로 이웃'을 수락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날 어떻게 알았을까, 마냥 신기했다. 그런데 반가움과 호기심에 상대 블로그에 가 보면 광고성 글을 올리는 블로그가 태반이라 실망하기 일쑤. 그런 방식의 블로그 운영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서로 이웃'이 되기엔 가는 방향이 달라 거리감이 느껴졌달까. 그럼에도 누군가 날 보고 있다는 건 두려움보단 설렘이었다. 예외는 언제나 있기 마련인지 무심하게 주고받는 하트 속에 유난히 반짝이는 하트가 종종 눈에 띄었다. 그 하트의 질감은 이전의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선하고 색달랐다. 작년에 시작한 브런치 활동으로 그런 감정이 말짱 거짓이고 허상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분명 혼자 글을 썼는데,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혼자가 아니었다. 나이도 성별도 관심사도 사는 곳도 목적도 달랐지만, 필력과는 무관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과의 소통은 혼자 글을 쓰며 맛봤던 희열과는 또 다른 벅참과 짜릿함을 가져다주었다. 흔히 소셜미디어 속의 관계를 인스턴트에 비유했다. 자극적이지만, 건강하지 않은 일회성. 정말 그럴까? 내가 경험한 소셜미디어 속 관계는 기대치가 크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때로 현실보다 더 끈끈하고 애틋했다. 실재하는 이들과 연결된 공간이 현실이든 가상이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중요한 건 공간이 아닌 진정성. 적어도 내겐 가상 세계는 더 이상 가상이 아니었다. 거긴 이미 또 다른 현실이었다. 


상처 입을 걸 뻔히 알면서 끊임없이 사람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건 시선 때문이었다. 사회적 부와 명성에 그토록 매달리는 것도 부러움과 인정에 대한 갈망 때문이리라. 만일 <오징어 게임>의 마지막 승자가 수백억 상금을 손에 쥐었을 때 그를 바라보고 환호해주는 이가 한 명도 없다면? 그래도 그는 행복할까? 곁에 아무도 없어도 근사한 집과 멋진 차를 갖기 위해 밤낮없이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는 노동을 찬양할 수 있을까? 벼랑 끝에 서서 핸드폰을 치켜드는 게 순전히 자기만족과 기록이기만 할까? 소설 <무진기행>에서 김승옥은 쓸쓸하다는 말을 세상 속으로 던졌다고 썼다. 그러고 보니 세상은 지금 쓸쓸함으로 아우성이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나 좀 봐 달라고. 세상과 타자를 향해 띄우는 이 시그널은 언젠가 되돌아올 메아리를 기다리는 지독한 외로움이리라. 


사람은 왜 친구가 필요할까?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서? 불필요한 감정 해소를 위해서? 일상과 경험의 공유를 위해서? 어제, 안 보고 산지 꽤 오래된 친구가 아들이 세계적 기업에 입사했다며 톡을 보냈다. 그 순간, 친구에게 내가 어떻게 소비되는지 훔쳐본 것 같아 마음이 언틀먼틀했다. 선뜻 축하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옹졸함은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관계를 맺은 공간이 현실이라 더 튼튼하고, 가상이라 더 허술한 것도 아니었다.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현실과 가상을 구분 짓지 않았다. 그 설렘, 그 나약함, 그 느닷없음, 그 상실감, 그 찌질함 같은 것들.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함께 있을 때 정서적으로 평안한 관계라고 한다. 평소 느끼던 불안마저 사라지게 하는 그런 관계와 달리 불안정한 감정에 기댄 관계는 그 출렁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변질된 관계를 합리화하고 집착하게 만드니까. 불교에서는 지성을 연마하면서 함께 길을 가는 이를 도반이라 한다. 부처는 그런 이를 선우(善友), 좋은 친구라고 했다. 그러니까 좋은 친구란 지성을 공유하고 가고자 하는 방향과 비전이 일치하는 이를 말한다. 소외와 단절로 상처 입은 현대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길은 선우(善友)와의 연결이 유일해 보인다고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말했다. 어쩌면, 선우(善友)는 그와 그녀에게 다친, 피폐한 영혼을 촉촉이 적실 단비일지도 모르겠다.


선우(善友). 내겐 그런 친구가 있다. 그 친구에게도 내가 선우(善友)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날은 그의 곁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맞춰 걸으며 좋은 친구로 늙어가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미 누군가의 선우(善友)이고, 그런 이들과 연결된 사람이길 바란다그러니, 우리 외로워 말자. 아니, 조금만 외로워하자.

작가의 이전글 어떤 걸 지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