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남기는 -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
남성과 친하지 않다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모두에게 얼마나 오만하고 무례했던 걸까?
그런 식으로 안전하게 살아온 내 세상은 얼마나 좁았던 거니?
너는 내가 새로 사귄 사람이고 그런 너의 성별이 남성이었을 뿐이다.
서로의 성별과 계급에서 오는 차별점과 권력을 자각하려 한다.
뭐 이런 것들 다 치우고
우린 그냥 네가 겪고 내가 겪는 일들에
눈물이 나는 친구잖아.
-김사월이 이훤에게. <고상하고 천박하게- 둘이서>
함께 뛰놀던 방학을 떠올리고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고만 해도 눈물이 솟는 씀벗이자 스승이 있다. 마지막 녹음하던 날이었지, 아마.
혹시 저한테 섭섭하거나 그런 건 없으셨나요, 그동안?
말을 빙빙 돌리다 서운한 게 왜 없겠냐고 대꾸했지만, 그때도 나는 알았고 지금은 더 또렷하게 안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러니까 영화에서처럼 딱 한나절만 잠겼다 오고 싶은 풍경이 몇 있는데 그중 한때가 그때라는 걸. 거기서 내가 사랑한 줄도 모르고 끌어안은 그때 그 사람들이랑 눈길 주고받으면서 밤이 이슥해지는 줄도 모르고 맛있는 것도 해 먹어가면서 두런두런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맞잡은 두 손 끈끈해져도 쉬이 놓지 않고 살 부대끼며 잠들었다가 한여름 밤 꿈인 양 깬다면, 정말로 그럴 수만 있다면…. 지나온 그 계절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마음속 풍경을 따라 그때 그 소리와 냄새와 일렁이는 빛 같은 것들이 살갗을 타고 일어난다. 아침을 찢는 새울음과 매미울음. 악착같이 솟구치고 삐대는 초록이파리와 색색의 여름꽃. 만개한 꽃 탐닉하는 배추흰나비의 팔랑임과 나른함. 빗줄기에 튕겨 올랐다 공중에서 터지는 흙내음. 달큼함으로 달겨드는 검은 날갯짓의 아찔한 비행. 계절이 몇 바퀴를 구른 지금도 입술이 그 계절을 달싹일 때면 자동반사적으로 물컹한 덩어리가 목울대를 치받치는데, 그 물컹함의 정체가 뭔지는 나도 모른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숨차게 자라고 뛰는 계절, 여름.
이마와 콧잔등에 송골송골, 초록 구슬 열리는 계절, 여름.
신비의 에메랄드빛 물구나무 선 계절, 여름.
나는 땡볕과 소나기와 태풍이 있는,
미색의 미숫가루와 빠알간 수박화채와 뽀오얀 콩국수가 동동 떠 있는 계절, 여름 한복판으로 맴맴맴맴 간다.
태생이 말 많은 공산당이라 하고픈 말도 많고, 되새기고픈 장면도 여럿이나 이하 생략하고 딱 요 말만.
그때 그 여름부터 시뚝빼뚝 삐치기 대장에 툭하면 문 꽝 닫고 나자빠지는 통에 속 끓이게 하는 것도 모자라 지독시리 말 안 듣는 고집불통인 찡얼이랑 노느라 무쟈게 애썼어요. (토닥토닥) … 다시 또, 고마와요.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이상, <이런 시(詩)> 중
덧
그나저나 내가 젤 좋아하는 영화감독을 말한 적 있등가?
우리 함께 지은 책 <영화처럼 산다면야>에서 내가 젤루 좋아하는 꼭지는?
달같이
- 윤동주
연륜(年輪)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