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우리

영화 <먼 훗날 우리>

by 여름

알림.

작년 여름,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를 보고 뒤늦게 주동우 배우한테 빠져서는 그녀가 나온 영화들을 보다가 영화 <먼 훗날 우리>를 봤습니다. 그때 제목만 써놓고 주저하는 사이 영화 <만약에 우리>가 개봉했습니다. (놀래라!) 이 글엔 영화 <먼 훗날 우리>는 물론이고 아직 보지 못한 영화 <만약에 우리>의 스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커다란 꿈을 품고 살다가, 그 꿈을 잃어버린다.

어떤 사람은 꿈 없이 살다가, 역시 그 꿈을 잃어버린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오래 묵혀둔 이 글을 무슨 얘기로 시작하면 좋을까, 머리를 굴려봅니다.

요전에 읽은 '군더더기' 얘기가 좋겠습니다. 시루떡을 먹다 바닥에 떨어진 팥고물 가루를 손가락으로 찍어 다시 입에 넣으려다 그 팥알들이 자신이 쓴 허술한 문장인 것만 같아 정신이 바짝 들어 이런 문장을 쓰며 살 순 없겠단 얘깁니다. 요깟 팥고물이 뭐라고 마음을 흔드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군더더기가 많을뿐더러 부서지기 쉬워 사방팔방 사금파리 같은 부스러기들을 흘리고 다니는 제 마음 끝엔 문장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이 주는 쌉쌀함 대신 들큼한 단물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군더더기가 많은 사람이고 게다가 군더더기를 좋아한다.'

- 한여진, <떡을 먹이고 싶은 마음> 중


요즘따라 이런 고백이 좋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4학년 때 우연히 시작한 펜팔을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까지 이어갔습니다. 상대를 바꿔가면서요. 사회성 부족으로 편지질을 끊지 못했던 건지, 기다림의 미학과 떨림에 길들여져 사회성이 떨어지게 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제 글이 고백으로 읽혔습니다. 그때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상대가 있든 없든, 장르가 뭐가 됐든 어쩌면 글은 고백이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고, 글은 고백이 맞습니다. 어느 한철 각별했던 이에게 언젠간 닿길 바라며 암호와도 같은 문장이나 단어를 끼워 넣기도 한.


'우리는 모두 평생 닿을 일 없이 각자의 궤도를 떠도는 별들이다.

별과 별 사이 수억 광년의 거리 속삭이듯 말해서는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난 온몸으로 춤을 춘다. 그 별이 당신에겐 아직 판독불가의 전파에 불과하겠지만 언젠간 당신의 안테나에 닿길 바라며 춤을 춘다'

- 영화 <아득히 먼 춤> 중


별똥별을 보겠다고 한겨울에 부러 깊은 산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찬 기운이 올라오는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온몸을 담요로 칭칭 감고 누워 별을 기다리던 그 밤, 새카만 하늘엔 깨알 같은 것들이 박혀서 반짝였습니다. 그때 휙, 하얀 선이 그어졌습니다. 설마, 저게 별똥별이야? 가슴이 콱, 막히면서 가슴께에서 뭔가가 일렁였습니다. 지금 저 별똥별은 어디서부터 온 걸까. 어디서부터 달려와 내 눈앞에서 한 생(生)이 지고 있나. 눈가를 훔치고 몇 번인가 꿈뻑이고는 다시 밤하늘을 보는데 맥박 같았습니다. 반짝반짝이는 별빛이. 지금은 지고 없는 별이 보내오는 생존신고 같으면서. 오늘 밤 우리 망막에 맺힌 별빛은 얼마나 먼 거리를 달려왔을까요. 얼마나 깊고 머언 어둠을 지나왔을까요. 목적지를 알고 달렸을까요. 별빛에게 그런 게 있기는 할까요. 무작정, 무턱대고, 떠나지 않았을까요. 언젠간, 닿으려고.


영화 <먼 훗날 우리>는 꿈과 사랑과 춘절이 눈더미와 함께 녹아내리는 영화입니다.

꿈을 좇아 베이징으로 떠난 젠칭과 샤오샤오는 춘절을 맞아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서 만납니다. 몇 년을 맴돌며 머뭇거리기만 하다 연인이 된 그들은 춘절이면 젠칭 아버지의 식탁에서 마주 앉지만, 좁은 방과 낡은 소파 사이 어디쯤에서 서로를 잃어버립니다. 10년 후 춘절,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납니다. 처음 만났던 그때 그 춘절, 눈더미에 갇힌 기차에서 내린 그들은 눈길을 걸어 고향까지 함께 걸어갑니다. 10년 후 다시 만난 춘절, 비행기에서 내린 그들은 모든 길이 눈으로 막힌 그 밤을 지새우며 오래전 눈더미에 파묻은 이야기를 꺼냅니다.


너를, 너의 문장을

그 숨과 맥박이 뛰던 모든 낮과 밤

검고 푸르던 모든 새벽

온 세상 등불이 켜지고 온 세상 종이 울렸지.


니가, 니 문장이

너의 숨과 맥박이 꺼진 모든 낮과 밤

세상 모든 빛이 꺼지고 세상 모든 꽃이 진 봄날

모든 행복의 이름과 함께 모든 색이 빠졌다.


영화를 보고 춘절과 기차와 식당 가득 피어오르던 김과 식탁을 메운 왁자함과 창밖으로 내리는 눈송이와 좁은 창을 비집고 쏟아지는 햇살과 창 위 화분과 거리마다 쌓인 눈더미만으로도 할 얘기가 정말 많아서, 그런데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제목만 써놓고 한참을 묵혔습니다. 말했다시피 저는 군더더기가 많은 데다 부스러기까지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라서요. 마침내 연인이 된 젠칭과 샤오샤오가 안녕도 없이 멀어질 땐 같이 부서지고 부서져 부스러기들을 천지사방 흩뜨리며 온몸의 피가 빠지듯 색이 모두 빠져나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잘 자.

처음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깔개 위에 몸을 뉘었을 때 희진은 문득 울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다.'

-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


설은 칙칙폭폭, 기차로 옵니다. 기차를 향해 달리던 겨울 새벽 공기와 노곤한 열기에 감긴 눈두덩이 위로 빠르게 지나던 주황빛 겨울볕, 다정하고 나란한 신작로의 나목들과 무뚝뚝한 전봇대, 어지러운 전깃줄, 적적한 들녘, 마을로 들어서는 좁따란 길. 뒤섞인 음식 냄새로 울렁이는 뱃속과 높낮이가 다른 목소리, 낯선 얼굴들. 이상하게 두근대던 가슴과 언제나 빗나가지 않던 불길함 같은 것들이 덜컹이는 기차 바퀴와 함께 달립니다.


게임 개발자로 성공한 젠칭은 게임 안에 자신만의 세계를 짓고 눈맞춤도 없이 떠나보낸 연인 샤오샤오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전파를 타고 편지가 날아갑니다. 샤오샤오에게 닿을 때까지.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때 니가 안 떠났으면 그 이후에 우리는 달라졌을까?

그때 니가 용기를 내서 지하철에 올라탔다면 평생 너랑 함께했을 거야.

그때 우리가 안 헤어졌다면?

그래도 결국엔 헤어졌을걸.

만약 그때 돈이 많아서 큰 소파가 있는 집에 살았다면?

니가 끊임없이 바람피웠겠지.

이도저도 안 따졌으면 결혼하지 않았을까?

진작에 이혼했겠지.

니가 끝까지 내 곁에서 견뎠다면?

니가 성공하지 못했을걸.

애초에 베이징에 안 갔다면?

니 바람대로 다 됐다면?

결국 다 가졌겠지.

서로만 빼고.


눈더미에 가로막인 차 안에서 샤오샤오는 말합니다.


젠칭, 나 좀 봐. 아이 미스 유.

나도 보고 싶었어.

내 말뜻은, 내가 널 놓쳤다고.


일본 소설가 쓰시마 유코는 'I miss you'에서 'miss'를 '빠져 있다'로, 그러니까 'I miss you'를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읽었습니다. 지난여름 바닷가에서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밀려오는 파도 때문인지 모래사장을 달구는 한여름 뙤약볕 때문인지 멀미가 나면서 어지럼증이 일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려면 상실과 결여 같은 텅 빈 상태와 그 뒤의 여진과 균열을 견디고 버텨야 한다는 씁쓸한 자각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쓰시마 유코의 'miss'가 '지금, 나의 충분함'을 채우지 못한 '너의 빠져있음'에 대한 서운함이나 원망이라면, 샤오샤오의 '미스(miss)'는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를 '과거에 두고 온' 나에 대한 책망과 후회입니다. 쓰시마 유코의 'miss'가 나에게서 너에게로 날아가는 화살촉이라면, 샤오샤오의 '미스'는 다시, 내게로 날아오는 부메랑과도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miss'는 뭘까? 저의 경우, 지독하게 사랑한 대상은 금기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저의 'miss'는 날아갈 곳을 잃어버린 쓸모없는 화살촉입니다.


'언젠가'는 '미래의 어느 때에 가서는'이라는 다가올 시절과 '이전의 어느 때에'라는 두고 온 지난날을 동시에 가진 묘한 부사입니다. 요즘 새로 생긴 버릇은 예전 제 글을 읽는 건데, 과거 의존형인 줄만 알았던 저한테서 미래 지향적 단서를 여럿 발견하면서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네, 무려 이 나이에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옛 것과 새것이 어지럽게 뒤엉킨 제 책상처럼 우리는 모든 시제를 넘나들며, 혹은 아우르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샤오샤오가 젠칭에게 물었습니다. 게임 속에서 이언이 켈리를 끝내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과거의 젠칭이 대답했습니다. 이언이 켈리를 끝내 못 찾으면 세상이 온통 무채색이 되지. 이 영화에서 과거와 현재를 구분 짓는 일반적인 색의 규칙이 뒤바뀐 이유입니다.


처음 당신 글을 읽었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암 환자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 꽝꽝 언 저를 흐물흐물 녹여 콸콸, 흐르고 흐르게 한 당신 글을, 그 시선을. 생시와 꿈결을 오가던 그제 늦은 오후께 그때 그 볕을 다시 쬐고는 말로 다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언젠간 당신 글이 밥이 되어 그늘진 세상 구석구석 비추고 녹일 빛이, 볕이 될 줄 알았습니다.


'이언은 영원히 켈리를 사랑해.'


젠칭의 고백이 샤오샤오에게, 샤오샤오의 세상에 닿았습니다. 놓친 색이 돌아옵니다.


암 환자가 되고부터 미래 시제를 빼고 살았으니 '언젠가'에서 과거만 붙들고 산 셈입니다. 그러지 말 걸… 투병 10년 차로 접어드는 이천이십육 년 설을 일주일 앞에 두고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에서야 성급했단 자각과 함께 불안함에 허둥댄 지난 시간과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보입니다. 이제쯤은 잃어버렸던 한쪽 날개를 조심스레 끼워 넣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어디로든, 훌훌, 날아보고도 싶어서요.


언젠간 우리




考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는 말합니다.

정의는 원래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거라고.

강은 녹을 테고 봄날은 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추위가 가시고 강이 녹아야만 들을 수 있는. 봄날은 와요. … 올 거예요. 언제고.

온 세상 사람들이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봄날.'

- 이연, <영화처럼 산다면야> 중


꿈과 글을 나누던 나의 비밀, 나의 씀벗 사하 작가님.

외롭게 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돌아와'*,

거뜬히, 이 겨울을 날 수 있는 힘을 쥐여준 당신이 있어

오래 묵힌 이 글을 마무리 짓습니다.

감사합니다.


우혜림 기자님을 함께 응원해 주세요.

오늘도 좋은 날이요!



*'그래도 돌아와'는 얼마 전 제 글 아래 남긴 박지향 작가님 댓글에서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