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슬로, 8월 31일>
자다가 눈이 떠졌습니다.
회백빛으로 꽉 찬 격자무늬 창틈이 보였습니다. 달도 숨어버린 밤하늘이 훤합니다. 눈이 내린다더니 어디선가 눈 냄새가 날 것만 같았습니다. 눈, 냄, 새…… 작게 말해봅니다. 눈 뒤에 숨은 이를 녹여내 올까, 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건 무얼까,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나 봅니다. 당신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뜻밖이고 의외인 것들에 흔들리고 요동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쉽고 한 편으론 까탈스럽다 할 수 있겠습니다.
'기쁨이 찹니다.'
당신 댓글에서 제가 반한 문장입니다. 이 짧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습니다.
기쁨이 찹니다. 기쁨이 찹니다. 당신 마음에 차오르는 기쁨을 상상해 봅니다.
기쁨과 차오름을 붙였다 뗐다…… 하면서 그 문장을 쓰는, 쓸 때에 당신을 그려도 봅니다.
함께한 여름을 꺼내놓고 당신이 쓴 글을 읽어도 봅니다.
처음 여기 왔던 때를 생각했습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열기에 취해 어쩔 줄 몰랐던 그때를.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한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과 그때에 저를 스쳐 지나간 것들과 떠나야지 떠나야지 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만 손꼽던 저를요. 떠나겠다 하면 바짓가랑이 잡으며 매달릴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떠났다… 다른 얼굴, 다른 이름으로 몰래 잠입하기엔 게으른 데다 그럴 자신도 없어서 구석탱이에서 사브작사브작 혼자 놀까 합니다.
오늘도 병원에 갔습니다. 은사님이랑 저는 병원 가는 걸 나들이나 순례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드라이브에 콧바람 쐬고 룰루랄라. 단지랑 붙어 있는 공원, 공원이랑 붙어 있는 병원. 걸어서 5분이면 갈 거리를 눈 구경한다고 30분 걸려 도착했습니다. 걸으면 발걸음 숫자만큼 생각도 많아집니다. 발바닥 신경이 뇌신경을 자극해서 그렇단 얘길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도 같은데 정확하진 않습니다. 나뭇가지에 누웠던 눈이 바람 손을 잡고 떠오릅니다. 햇살이 날아가는 눈가루를…… 빤짝빤짝!
밤새 염화칼슘을 뿌려놓은 자리는 길이 되었습니다. 그 옆으로 눈 위에 찍힌 어지러운 발자국이 보였습니다. 눈 쌓인 나뭇가지를 툭, 치고 어지러운 눈길을 걸었습니다. 내 발자국이 따라옵니다. 증상이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아직도 피가 나와서요. 바꾼 약이 맞는 것 같으니까 일주일만 더 써보고 소변 검사 결과를 보죠. 원인을 알 수 있나요? 아뇨. 물 많이 드시고 푹 쉬세요. 약국을 나와 뒤따라 오는 발자국을 돌아보면서 대개의 질병이 상세불명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깊이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요.
얼마 전엔 만두를 사서 언니랑 아부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요양 보호사가 무서운 얼굴로 설사가 잦으니 외부 음식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테이블 위에 종류별로 잔뜩 사간 만두를 아부지가 쳐다봤습니다. 고새 언니 이름도, 제 이름도 싹 다 까먹은 아부지한테 물었습니다. 아부지, 만두 먹을래? 끄덕끄덕. 언니는 절대 주면 안 된다고 했지만, 설사는 먹어도 안 먹어도 하는 거라고 우기고 몰래몰래 입에 넣어드렸습니다. 아부지, 맛있어? 끄덕끄덕. 아부지, 누가 젤 이뻐? 저를 쳐다보는 아부지. 흐흐흐. 언니가 손가락으로 CCTV를 가리켰습니다. 아부지, 우리 클났다! 돌아오는 차 안은 조용했습니다. 누구라도 말을 하면 울 게 뻔해서요.
지난 1년을 고백하자면, 눈도 귀도 입도 막았습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마음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읽지 않으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네에, 그런 사람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습니다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쓰기에 대해서는 숭배에 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환희의 다른 말이 두려움이라는 걸. 그게 얼마나, 얼마나…….
저는 읽기를, 쓰기를, 사랑합니다.
저는 읽기가, 쓰기가, 무섭습니다.
겁이 납니다. 사랑하는 게. 미치는 게. 숭배가.
저는 재가 될 때까지… 타올랐습니다. 타는 사람입니다.
그걸 몰랐습니다.
오후 볕에 나뭇가지에 앉았던 눈이 녹아내립니다. 책상 위로 새 그림자가 간간이 지나갑니다. 비둘기 서너 마리가 베란다 난간에 앉았다 어디론가 날아가더니 다시, 날아옵니다. 아까 그 비둘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집으로 이사오던 그해 겨울이 생각납니다.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무지 추웠던 그 며칠이.
눈치채셨겠지만, 눈은 핑계입니다. 차오른 기쁨과 글로라도 자주 보자, 는 말이 저를 움직였습니다.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팠는데, 때맞춰 눈이 와버렸고 거기, 차오른 기쁨과 글로 보자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뭐가 됐든, 고맙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글을, 편지를, 쓸 수 있게 해 주어서요. 편지를 사랑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정말 오랜만에 긴 숨으로, 오래, 마음을 부려놨습니다.
오늘도 좋은 날이요!
덧
당신에게.
(낯부끄러워져 이 글을 지우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사진은 병원 다녀오는 길에 찍은 겁니다.